고(故) 천경자(1924∼2015) 화백의 작품인지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는 ‘미인도’가 27년 만에 일반에 모습을 드러냈다. 임준선 기자
오전 10시 개관 시간에 맞춰 도착한 과천관 제4전시실에는 이미 3명의 관람객이 미인도 앞에 서 있었다. 마치 관람객이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액자 속 한 여성이 관람객들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작품을 감상하고 있던 김 아무개 씨(40)는 “미술계에 종사하다보니 예전부터 미인도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 스토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일반에 공개된다고 했을 때부터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개인적으로 위작이다 아니다 뭐라 할 수 없지만 이렇게 미인도에 대한 시작과 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게 좋았다”고 말했다.
미술관 측은 미인도 전시에 전시실 안쪽 공간 하나를 통째로 할애했다. 안벽에 가로 130cm, 세로 142cm의 무반사 강화유리장을 만들어 그 안에 미인도를 내걸었다. 실제로 본 미인도 작품은 가로 26cm, 세로 29cm로 A4 용지보다 조금 큰 크기였다. 화관을 쓴 여인과 어깨 위에 앉은 나비까지 가까이 들여다보니 뚜렷한 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미인도의 작가 이름을 적시한 표찰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미술관 관계자는 “유족에 대한 배려로 미인도 작가에 ‘천경자’ 이름을 뺀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신 미술관 측은 미인도 옆에 탁상등이 설치된 아카이브 진열장을 마련해 그간 미인도를 둘러싼 진위 논란의 내용을 담아냈다. 미인도가 미술관에 이관된 1980년대 당시의 인수 서류들과 언론에 공개된 진위 공방 관련 문서, 천 화백이 생전에 작품이 가짜임을 명시하며 서명한 확인서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위 논란이 시작된 1991년 당시 미인도 관련 기사부터 지난해 검찰의 ‘진품’ 발표가 있기까지의 언론 기사들도 진열돼 있었다.
미인도 그림 오른쪽 벽에 전시된 천 화백의 소회가 담긴 글도 눈에 띄었다. 이는 위작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한 지난 1991년 천 화백이 한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것이다. “모든 게 하여튼 막 봐서 엉성한 그림이에요. 그래서 제가 악을 쓰다시피 가짜다 라고 악을 썼어요. 눈에도 힘이 없고요. 대개 제가 코 같은데 (그럴 때는) 코 여기가 사실적으로 보면 높으잖아요? 그런데 코 여기도 벙벙하게 돼 있고…”
이같은 미술관 측의 전시 구성은 미인도를 천경자 화백의 작품으로 단정하는 대신 미인도와 수 십년간 이어져온 진위 논란을 전시의 초점으로 삼은 것으로 풀이된다. 일반 공개에 앞서 지난 18일 기자간담회에서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미인도는 전시의 일부로 작품의 진위 여부를 따지거나 특정 결론을 내리기 위해 선보이는 것이 아니다”며 “미인도가 논란의 대상이 아닌 감상의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미인도 옆에 탁상등이 설치된 아카이브 진열장이 마련돼 그간 미인도를 둘러싼 진위 논란의 내용을 담아냈다. 사진은 위작과 관련한 1999년 7월 일요신문 기사.
아카이브를 둘러보는 사이 미인도 앞에는 대여섯 명의 관람객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 중 미인도를 유심히 감상하던 한 남성이 자신의 몸으로 미인도 전체를 가려 다른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작은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자신을 한국화를 전공하는 미술학도라고 소개한 이 남성은 “천경자 선생님의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미인도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왔다”라며 “사실 인터넷 화면으로 봤을 땐 당연히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와서 보니 생각보다 정교한 것 같아 놀랐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와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아카이브를 살펴보던 등산복 차림의 김진하 씨(55)는 “미인도 작품이 전시되는 줄 몰랐다”며 “우연히 들렀는데 뉴스로만 접하던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게 돼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실 미인도가 이렇게 오래전부터 논란이 돼 온 것인 줄 몰랐다. 30년 가까이 전문가도 못 가려낸 논란의 작품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돼 놀랍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유족 측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인도를 공개 전시하는 것에 대해 추가 고소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재 천 화백 유족 측은 지난해 검찰 발표 이후로도 ‘미인도’가 위작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고 항고한 상태다. 19일 천 화백 유족 측 공동변호인단 일동은 “현재 항고가 진행 중이며, 향후 민사소송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위작’ 미인도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개 전시하는 행위는 명백히 현행법상 새로운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한다”고 입장을 전했다.
아울러 유족 측은 미술관이 작가 이름 표시 없이 ‘미인도’를 전시하고 있지만 그림 자체에 천경자 화백의 이름이 있는 점을 지적하며 “이 작품이 마치 천 화백의 작품인 양 표방하며 전시하는 그 자체가 저작권법 위반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어 “형법 308조의 사자명예훼손죄에도 해당된다”고 주장하며 “공개전시를 결정하고 지시한 관장과 결재권자, 실무자들 전원을 고소할 것”이라고 강경 입장을 전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