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지도 벌써 1분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엔터테이너이자 부동산 재벌 출신인 트럼프는 그 등장부터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아메리칸 퍼스트(America first_미국우선주의)’를 표방한 트럼프는 내놓은 공약마다 파격적이고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밖으로는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해 자발적 고립을 꾀하고, 안으로는 ‘오바마 케어’로 상징되는 각종 복지정책들을 폐지 혹은 축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죠. 그의 공약 상당수는 재벌 기업, 백인과 중·상류층 등 미국 주류 사회에서 큰 호응을 받은 반면, 국제사회와 자국 나머지 계층으로부터는 큰 우려를 샀습니다.
트럼프 당선과 함께 미국 안팎에선 ‘트럼프 포비아(Trump Phobia․트럼프 공포증)’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였죠.
자...그렇다면 트럼프가 내놓은 그 파격적인 공약들...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불행인지 다행인지 ‘노(No)!’입니다. 트럼프는 아마도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단 시간 내에 가장 많은 공약을 스스로 파기한 인물로 기록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 된다’는 말이 우리나 미국이나 정치란 분야에선 다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일각에서는 ‘선동가’ 트럼프가 이제야 현실 정치를 마주하고 ‘정치인’ 트럼프로 자연스레 변모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죠.
1. 중국 환율조작국 지정-파기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한 것은 트럼프가 후보자 시절 내건 공약 중 가장 상징적인 공약이었죠. 트럼프 지지자들은 물론 대다수 미국 국민들이 열광했던 공약이기도 합니다.
트럼프는 유세기간 내내 “중국이 환율을 조작하고 있다”라며 “이로 인해 많은 미국인들은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중국의 환율 조작국 지정 실현을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취임 첫 날에도 그는 중국 물건에 4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중국을 바짝 긴장케 했죠.
하지만...이 공약은 시진핑 중국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단박에 파기 됩니다. 최근 트럼프 스스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최근 몇 개월 동안 환율을 조작하지 않았다. 중국은 환율조작국이 아니다”라고 중국을 두둔하며 ”이번 주 나올 예정인 보고서에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물론 북핵을 둘러싼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협조가 필요했기에, 트럼프가 현실적 선택을 했다는 시각도 존재하지만...어찌됐건 공약은 깔끔하게 파기됐습니다. 물론, 트럼프는 푸틴이란 친구를 잃은 마당에 시진핑이란 좋은 친구 하나를 사귀게 됐다는 소득은 있었지만 말이죠.
2.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현실적 어려움
트럼프가 내건 주요 공약 중 하나는 미국-멕시코 국경 간 장벽 설치입니다. 히스패닉 불법체류자들을 적극 통제해 자국민의 일자리를 보호하고 치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뭐 일단 장벽 설치를 시행할 건설사들의 입찰은 마무리되고 일부 시험용 장벽들은 설치가 진행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탐사보도 매체 <프로퍼블리카>의 보도에 따르면 결국 돈이 문제라고 합니다. 이 매체에 따르면 국경 장벽 설치를 위해 필요한 총 예산 규모는 22조 8000억 원에 달하지만 현재 미국 정부가 마련한 건설 자금은 고작 228억 원에 불과하다고 하네요. 비율로 따지면 0.1%. 이 돈으로는 1600km에 달하는 국경 중 불과 11km정도 밖에 설치를 못한다고 합니다.
일단 트럼프 행정부는 내년 예산안에 3조 원 가량의 국경 장벽 설치 자금을 책정하고는 있지만 야당인 민주당이 기를 쓰고 ‘결사 반대’를 외치고 있는 터라 갈 길이 멀 전망입니다.
3. 미국, ‘쓸모없는 나토(NATO)’ 탈퇴 시사-파기
트럼프는 대선 기간 중 미국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탈퇴를 시사했습니다.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 상당수가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줄기차게 외쳐왔죠. 왜 미국은 나토의 방위비 큰 몫을 분담하고 있는데 정작 유럽 본토 회원국들은 정당치 못한 몫을 내지 않고 있느냐는 식이었습니다. 트럼프는 그럼에도 왜 미국은 이들이 외부의 공격을 받을 때 자동으로 개입해야 되느냐 따져 물었습니다. 한 마디로 나토는 “쓸모가 없다”고 평가 절하했습니다.
그러던 트럼프가 변했습니다. 지난 12일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과 면담한 트럼프는 “예전에 나는 나토에 대해 불평하고 쓸모가 없다고 말했지만 이제 나토는 변했다. 테러와 맞서고 있다”라며 “이제 난 나토가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한입으로 두말을 하게 된 셈이죠.
물론 여기에도 트럼프의 현실적인 계산이 깔렸다는 분석입니다. 무엇보다 시리아 사태로 인해 등을 지게 된 러시아가 문젯거리로 떠오른 겁니다. 러시아와 마주하는 나토가 다시금 쓸모가 생긴 거죠.
4. 오바마 케어 폐지-실패와 오락가락 사이
미국의 의료보험 개혁 추진은 항상 필요성이 제기돼 왔지만 막상 손대기는 어려운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전임자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과 함께 강도높은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왔고, 결국 ‘오바마 케어’로 명명된 의료보험 개혁안(정확히는 ‘환자보호 및 부담적정보험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살인적인 미국의 의료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대다수 차상위 계층을 의무적으로 보험에 가입시켜 국가의 테두리에 두고자 하는 것이 법의 골자였죠. 물론, 미국의 의료보험료가 의료비만큼이나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은 큰 함정이었지만...
트럼프는 이 오마바 케어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해 왔습니다. 출범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죠. 트럼프는 일단 2017년 1월 20일, 오바마 케어 폐지 명령에 서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 모델이 없었습니다. 지난 3월, 나름의 기존 법안을 수정한 이른바 ‘트럼프 케어’ 법안이 나왔지만...정작 공화당 안에서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사실상 보류된 상황입니다.
트럼프 스스로 다시금 오마바 케어 폐지에 불을 당기고 있다지만...현실은 막막합니다.
5. 공무원 고용 동결조치-완벽한 철회
트럼프 스스로 야심차게 준비한 게 바로 ‘작은 정부’죠. 트럼프는 취임 직후 ‘공무원 고용 동결 행정명령 조치’를 실시하며 자신의 공약을 실현했습니다. 미국 모든 정부기관의 인력을 줄이고 연봉을 동결해 정부 운영 예산을 효율화하겠다는 방침이었습니다. 물론, 월급이 동결된 공무원들은 눈물을 쏟고, 미국의 공시생들은 이를 갈았겠지만... 일부 국민들은 정부 운영의 효율성 증진 측면에서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지난 12일 자신의 행정명령을 돌연 철회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모순에 걸린 것이죠. 트럼프는 ‘작은 정부’ 실현이라는 공약을 내거는 한편, ‘재향군인부’ 등 정부 조직을 새롭게 증편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정작 정부 조직을 줄이겠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정부 조직을 신설하는 짓을 한 거죠. 이에 필요한 공무원 인력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결국 트럼프는 공무원 고용 동결조치를 철회하고 두손두발 들었습니다. 백악관 대변인은 이를 두고 ‘훗날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말로 포장했지만...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6. 8년 내 20조 달러 부채 해결-내가 언제?
정확히 1년 전.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충격적인 공약을 내겁니다.
“내가 재임 8년 내(자그마치 재선을 염두에 두고)에 미국의 20조 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해결하겠다”
트럼프의 당시 발언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 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지만...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백악관은 ‘내가 언제?’라는 반응입니다. 지난 12일 멀베이니 미국 백악관 예산관리국장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앞서 트럼프의 발언을 두고 “4년 안에 20조 달러나 되는 국가부채를 다 갚을 수 없다”라며 “내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솔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딱 잡아뗐습니다.
이 밖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전에 내걸었던 수출입은행(EXIM Bank) 폐쇄 계획,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축출 공약을 줄줄이 파기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트럼프는 ‘프로 공약 브레이커’라 할 만 하지 않나요.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