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법원 내부엔 ‘막강한 힘’을 가진 조직이 있다. 대법원장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고, 각종 법원 행정업무를 보는 법원 행정처다. 명목상으로는 재판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지만, 이 조직의 영향력은 전국 모든 법관에게 닿는다.
대법원 규칙을 보면, 법원행정처에는 법관들에게 민감할 수밖에 없는 업무가 모두 집중돼 있다. 행정처 인사관리실은 전국 2800여 명에 이르는 판사들의 인사평정과 업무량 분석 등을 통제한다. 인사 제도 연구와 법조인력 수급·양성 등 연구는 사법정책실이 맡고, 법관들의 비위 감찰과 징계의결 등은 윤리감사관실에서 담당한다. 전국 모든 법관들의 기록은 법원 행정처를 거쳐 인사권과 보직권을 가진 대법원장에게 전해진다는 얘기다. 서초동의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한 조직 내에 모든 법원 행정 업무가 집중돼 있다. 일선 법관들이 행정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행정처의 영향력은 ‘담당 업무’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한 전직 법조계 고위 인사의 말이다. “행정처에 들어갔다는 건 능력뿐만 아니라 서열까지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연수원 기수가 낮더라도 예우를 받는다. 보통 부장판사 승진을 앞둔 판사들이 심의관으로 발탁되는데 ‘법관의 꽃’이라 불리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인사와 견줄 정도로 관심이 높다.”
전‧현직 판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법원행정처는 법원 ‘중심’에 닿기 위해 꼭 거쳐야할 ‘필수 코스’로 인식된다. 실제로 조직의 수장인 행정처장은 총 14명의 대법관 중 한 명이 맡는데, 역대 행정처장은 대법원장이 되거나 대법원장 후보 1순위로 거론됐다. 처장 아래 행정차장은 고등법원 부장판사급으로, 이 자리를 거친 뒤 대법관으로 승진했고 일부는 헌법재판관이 되기도 했다. 또한 그밖에도 행정처 출신들은 법원을 나와 대형 로펌의 주력이 되거나, 청와대에 발탁되는 경우도 있었다. 앞서의 판사 출신 변호사는 “법원행정처는 한국 사법부와 법조계의 ‘핵심’이라는 말이 과장된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최근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불거진 일련의 사태들의 파장이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막강한 힘’을 가진 행정처가 사법개혁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학술연구회에 압력을 행사하고 일선 판사에게 부당한 인사 조치를 내리는 등 권한을 남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 법원 안팎에선 “우려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 ‘블랙리스트’ 조사 결과, 반응은 냉담
지난 2월, 법원행정처는 법원행정처 심의관인 이 아무개 판사에게 법원 내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행사를 축소하도록 지시했다.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일선 판사들을 상대로 사법독립과 법관인사제도에 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 판사는 한달 전 법원 정기인사에서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이 지시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 과정에서 “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판사들을 뒷조사해 작성한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의혹도 나왔다. 의혹이 불거진 지 한 달이 지난 3월 22일, 이인복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판사회의를 통해 추천된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진상조사위는 26일간의 조사 끝에 지난 4월 18일 결과를 내부 전산망 코트넷에 공개했다.
조사위가 공개한 보고서를 보면, 행정처에서 학술대회 개최를 앞두고 동향을 구체적으로 파악했으며 축소를 시도했다는 의혹은 일부 사실이지만, 부당한 지시와 인사 불이익 의혹은 사실과 다르고 블랙리스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의혹의 일부는 맞고 대부분 틀리다는 얘기다.
조사 결과에 대한 일선 법관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조사위의 보고서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특히 강한 비판이 나오는 부분은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다. 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블랙리스트에 대해 처음 언급했던 현직 법관은 “(학술대회 축소 시도 의혹을 받은) 이 아무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파일이 있다. 거기에 판사들 뒷조사한 파일이 나올 텐데 놀라지 말라’고 들었다”는 취지로 조사위에 진술했다.
현직 법관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술을 한 만큼 언급된 ‘컴퓨터’ 즉, 물증을 조사하는 건 당연하다는 게 일선 법관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조사위는 보고서를 통해 “법원행정처가 보안상 이유로 거부했다. (컴퓨터를) 강제로 확보할 근거가 없었다”고 밝혔다. 결국 조사위는 법원행정처가 제출한 학술대회 동향파악 문서와 행정처 관계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이에 대해 한 지방법원의 판사는 “물증 확보가 어려웠다면 결론을 내지 말았어야 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확인이 안 된 결과를 현직 법관들이 납득할 수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또한 조사위는 학술연구회에 압력을 행사한 관계자로 앞서의 이 아무개 상임위원 한 명을 꼽았다. 조사 보고서 곳곳에 “법원행정처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표현이 수차례 등장하지만 정작 책임자는 단 한 명이란 얘기다. 또한 조사위 결과에서 이 상임위원이 법원행정처 차장이 주재하는 실장회의와 법원행정처장(고영한 대법관)이 주재하는 주례회의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해 조처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행정차장과 처장, 인사권을 가진 양승태 대법원장 등은 서면 조사로 마무리 됐다. 앞서의 판사 출신 변호사는 “조사위 결과만 봐도 부당 지시의 주체로 지목된 이 상임위원의 개인적 행동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특히 행정처 조직 특성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조사위 결과에 대한 지적과 함께 행정처 개선 목소리도 높다. ‘막강한 힘’을 가진 행정처 조직 개편, 또는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행정처 구조상 또 다른 의혹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또 다른 판사 출신 변호사는 “법원 행정처가 인사권을 가진 대법원장의 보좌기관으로 전락했다는 의견은 과거부터 내부에서 늘 지적돼 왔다”며 “인사나 기획 등의 부서를 분산하거나, 법무부로 옮기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고영한 법원행정처장은 조사위 결과 공개 이틀 뒤인 지난 4월 20일 코트넷에 입장을 밝혔다. 고 행정처장은 “진상조사위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합당한 조치를 강구하겠다”며 “행정처 업무처리 시스템과 관행 개선 등 노력을 오늘부터라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고 행정처장의 입장 발표에도 내부 반발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부당 행위 인정이나 책임 문제는 빠져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각급 법원 판사회의 대표 등이 관련자 징계 요구 방안 논의에 들어가는 등 구체적인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행정처의 후속 조치가 미흡할 경우 법원 내부의 집단 반발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