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만약 그가 국이 크고 선한 리더를 만났다면 분명 말없이 충성하며 충실하게 그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했을 터였다. 그러면 그는 권력으로만 움직이는 세상이 아니라 큰 세상, 따뜻한 세상을 배우며 무리가 없는 사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자신을 끌어줄 보스의 눈에 드는 사람이 보스와의 내적인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가 누구든 그는 보스의 충실한 종을 넘어설 수 없다. 자기 가치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계급장을 달아주는 보스의 판단에서 온다고 믿으면 보스의 마음에 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 위해 기를 쓰지 않겠는가. 나는 묻는다. 지금 초라하기만 한 그의 모습은 그가 만든 것일까, 박 전 대통령이 만든 것일까.
자기 판단이 있는 사람이라면 황당하기까지 한 부당한 지시, 기막힌 지시, 더구나 일방적이기만 한 지시에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까. ‘나’를 번잡하고 당황케 하는 자기판단이 힘에 부칠수록 그런 이들은 판단을 중지하면서 내 계급장을 달아줄 보스의 판단에 모든 판단을 맡기고 그저 ‘나’는 행동대원으로 만족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수석님” “수석님”하며 굽실거리는 행태에 취해 모든 사람이 ‘나’의 계급장을 부러워한다고 믿을지도 모르겠다.
설령 계급장이 부러운 것이라 해도 사람은 계급장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남이 부러워하는 그것으로 결코 내 삶이 채워지는 법은 없으니. 지금 이 사람, 저 사람 재판에 돌아다니며 구치소에서조차 바쁜 그를 보며 그가 아꼈을 그 계급장이 그의 삶에 얼마나 좋지 않은 것이었는지를 온몸으로 배우고 있을 것이다. 보스와의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죄, 보스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지향성과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죄, 자기 삶을 모독한 그 죄가 거기에 이르렀음을.
계급장도 잃고, 보스도 잃고, 명예도 잃고, 건강도 잃고, 어쩌면 그가 지향해왔던 모든 것을 잃은 그 자리는 어쩌면 운명이 새로운 삶을 주기 위해 마련해 놓은 곳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자존감을 스스로 버려 거기에 이르렀으니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터널을 지나 홀가분해지기를 바란다. 그동안 지향해왔던 그것들 없이도 삶을 잘 경영할 수 있는 자존감을 회복하기를.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