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저씨가 ‘아재’가 되며 어감이 살짝 바뀌었다. 몇 년 사이 화제를 모은 ‘아재 개그’는 조금 민망하고 철지난 개그지만 헛웃음짓게 만든다. 게다가 꽤 중독성이 있어 “유치하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왜? 나는 재미있는데?”라고 말하는 이들도 종종 등장한다.
트렌드에 민감히 반응하는 방송가는 이미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다. 아재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예능을 속속 선보이는 이유다. 평균 나이 40대 이상의 출연진이 좌충우돌하는 모습에 비슷한 연배의 시청자들은 동질감을 느끼고, 10~20대는 신선한 재미를 맛본다.
‘아재파탈’(아재+팜파탈)의 선두주자는 단연 SBS <미운 우리 새끼>다. 금요일에서 일요일 밤으로 편성 시간대를 바꾼 이 예능은 어느덧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거두고 있다. 그 주역은 가수 김건모, 방송인 박수홍과 이상민, 가수 토니안 등이다. 맏형인 50세 김건모부터 막내인 40세 토니안의 평균 나이는 약 45세. 하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혹은 돌싱인 출연진의 짠내 나는 삶은 웃픈(웃기고 슬픈) 현실을 보여준다.
사진출처=‘미운 우리 새끼’ 홈페이지
여전히 술이 고픈 김건모는 술장고를 사고, 냉온수기에 물통이 아닌 소주통을 꼽는다. 뒤늦게 노는 맛을 알게 된 박수홍은 클럽을 전전하다 결국 클러버들의 천국인 스페인 이비자 섬까지 가게 됐다. 69억 원의 빚을 졌지만 개인파산도 신청하지 않고 이를 갚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상민의 짠돌이 삶은 나머지 멤버들과는 상반되지만 TV 밖에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을 누군가를 위로하고 용기를 준다.
예능 흐름을 주도해가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tvN의 2017년 예능 키워드 역시 ‘아재’다. tvN은 한때는 대한민국을 주름잡았지만 이제는 ‘그냥 아재’가 돼버린 배우 신현준과 최민용, 가수 조성모 등을 모아 <시간을 달리는 남자>를 선보였다. 신세대들의 문화를 체험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신조어를 맞추며 현실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웃음이 유발된다.
tvN과 XTM에서 함께 방송되는 <남원상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남자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는 것이 콘셉트다. 제작진이 ‘원기를 잃은 남자들의 로망실현부터, 친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남자들의 고민 해결까지 남자들의 원기 상승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한 <남원상사>는 예를 들어 직장 내에서 여자 직원들과 소통이 없이 외롭게 지낸다는 의뢰인의 사연을 듣고 함께 고민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종합편성채널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TV조선은 배우 김수로, 가수 이현우, 셰프 최현석 등이 출연하는 <아재독립만세! 거기서 만나>를 4월 25일 첫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은 한적한 공간에 지어진 각자의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가족의 눈치를 보느라 못했던 것들을 즐기며 2박3일 동안 자유를 갖는 모습을 담았다.
제작진은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살아온 이 시대의 남편이자, 아빠이자, 가장인 아재들은 고충과 스트레스가 크다. 가족을 위하는 책임감에 눌려 본인보다는 가족 위주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중년 남성들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사진출처=‘아재독립만세! 거기서 만나’ 공식 홈페이지
맏형인 이현우는 “벌써부터 자유를 누릴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무 것도 안하고 쉬고만 싶다”는 바람을 전했고 막내 최현석 셰프는 “나는 드론, 게임 등등 하고 싶었지만 아내의 눈치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리스트로 정리해왔다”고 말하며 아재 본능을 드러냈다.
채널A는 이달 초 <사심충만 오!쾌남>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절친한 방송인 김성주 안정환을 비롯해 개그맨 조세호, 배우 한상진 등이 모여 완벽한 쾌남이 되기 위한 ‘쾌남 수업’을 받는 형식이다.
김성주, 안정환 외에 방송인 김용만, 정형돈이 출연하는 JTBC <패키지로 세계일주-뭉쳐야 뜬다> 역시 패키지여행을 주제로 다뤘지만, 평균 나이 40대 중반인 아재들이 함께 여행하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아재 예능으로 분류된다.
아재 예능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별 거 없다’다. 치맥 내기 국궁 대결을 벌이고, 학창시절 소풍으로 갔을 창경궁을 찾아가기도 한다. 패키기 여행을 떠나지만 어떤 의미를 담기보다는 좋은 풍광을 즐기며 힐링을 좇는 데 집중한다.
한 방송 관계자는 “바로 그 지점이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라며 “현실 속 아재들은 가장으로서 삶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면서도 쉽게 인정받지 못하고, 젊은 세대에게 외면받는다. 그런 아재들에게 필요한 것은 억지로 주입하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휴식과 재미를 추구하고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아재 예능이 남성 중심적 예능 추세를 강화시키고 새 얼굴 발굴을 더디게 만든다는 지적도 있다. KBS 2TV <언니들의 슬램덩크2>와 <하숙집 딸들> 등 여성을 앞세운 예능도 있지만 별다른 반응은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하는 아재 예능이 예능의 흐름을 남성 위주로 만들며 여성 예능인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받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20년 전 데뷔 후 전성기를 누린 남성 방송인들이 20년이 지나 아재가 된 후 다시금 주목받으며 젊은 피를 발굴하고 기용하려는 방송가의 의지가 줄어든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방송 관계자는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특정 방송인들의 활동과 겹치기 출연이 두드러진다.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도 좋지만, 과감한 시도를 통해 새 얼굴을 키우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