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정치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인 파스칼 페리뉴는 프랑스 정치판에 혜성처럼 등장한 에마뉘엘 마크롱(39)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마크롱이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급부상할 줄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치 경력이라고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보좌관을 거쳐 경제장관직을 역임했던 것이 전부. 때문에 지난 2016년 4월 사회당을 나와 독립 정당인 ‘앙마르슈!’를 창당했을 때만 해도 그를 비웃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현재, 판세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지난 1차 투표 때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면서 결선에 진출한 마크롱은 현재 경쟁 후보인 극우 정당의 마린 르펜보다 약 20%포인트를 앞서면서 엘리제궁에 성큼 다가선 상태다. 단 한 번도 선거에 출마한 경험이 없는 그야말로 풋내기 정치인인 마크롱이 단숨에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프랑스 언론들은 역대 최연소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구태 정치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불신과 실망감이 폭발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이 젊은 마크롱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프랑스’다.
39세의 에마뉘엘 마크롱이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4월 6일, 프랑스 북부 아미앵에서 신생 정당 하나가 새롭게 창당을 선언했다. 200여 명이 참석한 그 자리에는 TV 카메라도, 취재 기자들도, 그리고 이렇다 할 홍보 전단도 없었다. 이 신생 정당의 당명은 ‘앙마르슈(전진)!’.
창당을 선언한 당시 경제장관이었던 마크롱은 ‘앙마르슈’의 정치 성향이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고 천명하면서 오히려 양쪽 진영의 정치 스펙트럼을 모두 갖고 있다고 말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적으로는 진보 성향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친기업 성향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마크롱을 가리켜 ‘제3의 길’을 걸었던 중도 성향의 정치인들, 가령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과거 초당파적 정부를 구상했던 샤를 드골 전 대통령과 닮은 구석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 마크롱은 지난 2월 리옹의 유세장에서 지지자들에게 “나는 오랫동안 둘로 분열되었던 프랑스를 봉합하려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좌와 우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좌우 모두를 표방하는 마크롱의 이런 정치적 스탠스는 이번 대선에서 효과를 거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오히려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던 사회당의 브누아 아몽 후보와 공화당의 프랑수아 피용 후보를 물리치고 1차 투표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오히려 마크롱의 중도적 입장이 여러 차례의 테러 공격 후 둘로 나뉜 프랑스 민심을 보듬는 데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1차 투표에서 24%의 득표율로 본선에 진출한 마크롱은 21.3%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한 극우 정당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과 오는 5월 7일 결선 투표를 치른다. 1958년 결선투표제가 도입된 이후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양대 정당(공화당, 사회당)의 후보가 결선에 진출하지 못하는 대신 비주류 정당 후보들이 결선을 치르게 됐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가히 충격적이다. 그것도 의석수가 0인 중도 신생 정당에서 유력한 후보가 나왔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신선한 파장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현재 마크롱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르펜을 20% 포인트 넘게 따돌리면서 승기를 잡고 있다.
여기에 더해 1차 투표 경쟁자였던 피용, 아몽 등 정치 거물들이 잇따라 마크롱 지지를 선언하는 한편, 올랑드 대통령까지 나서서 지지를 선언하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게임은 끝났다’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또한 르펜의 반EU, 반난민 정책 등 극우 정책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거부감도 마크롱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마크롱 측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남은 기간 동안 변수로는 1차 투표에서 단 18%의 득표율에 그쳤던 밀레니얼 세대의 표심, 그리고 선거 직전 테러가 발생할 경우 나타날 민심의 변화, 엘리트 계층 출신이라는 국민적 거부감 등이 꼽히고 있다. 기성 정치인들의 잇단 지지 선언 역시 자칫하면 독이 될 수 있다. 르펜 측이 주장하는 ‘실패한 올랑드의 후계자’라는 꼬리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이렇게 단기간에 정치인으로서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걸까. 혹시 운이 좋았던 건 아닐까. 이에 마크롱의 측근들은 오늘날 20만 명이 넘는 등록 당원을 보유한 ‘앙마르슈’의 성공은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온 결과물이라는 것이 측근들의 설명이다.
가령 지난해 11월 대선 출마를 결심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면서 그를 만류했었다. 마크롱의 정치 멘토이자 고문인 알랭 밍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밍크는 “나는 2022년에 출마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마크롱을 설득했었다. 하지만 마크롱은 말했다. ‘당신은 틀렸어요. 지금이 기회예요’”라고 말했다. 또한 <애매모호한 마크롱씨>의 저자인 마크 앙데벨은 “사실은 2015년 가을부터 모든 것이 준비되기 시작했었다”라고 말했다. 단지 2015년 말 파리 테러 사건이, 그리고 2016년 초 브뤼셀 테러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4월까지 창당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눈부시게 빨리 성장하는 속도 역시 주목받고 있다. 첫 번째 출마하는 선거가 지방 선거도 아닌 대선이라는 점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밍크는 “몇 달 만에 그는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그리고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했다”고 평가하면서 “15년 동안 그를 알고 지내왔지만 정치를 배우는 속도에 매우 놀랐다. 마크롱은 창문 밖으로 던져도 네 발로 착지하는 고양이와 같다”고 말했다.
마크롱은 고교 시절 선생님이었던 브리지트 트로뉴와 결혼했다. 둘은 공개석상에서 보란듯이 애정표현을 한다. EPA/연합뉴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마크롱의 꿈이 정치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원래 꿈은 소설가였다. 1977년생인 마크롱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조숙한 학생으로 유명했다. 프랑스 문학에 푹 빠져 있는 한편 시를 즐겨 쓰는 문학도였다. 한 동창생은 “마크롱은 또래의 친구들과 달랐다. TV를 보는 대신 독서만 했다. 어떤 면에서는 선생님들과도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런 조숙함 때문에 선생님과도 곧잘 어울렸던 마크롱은 고등학교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선생님과 급기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현재 그녀의 아내가 된 브리지트 트로뉴(64)와의 러브 스토리는 나이를 초월한 그야말로 세기의 로맨스가 됐다. 당시 세 아이의 엄마이자 유부녀였던 트로뉴는 현재 7명의 손주를 두고 있는 할머니다. 장남인 세바스티엔은 마크롱보다 두 살이 더 많고, 장녀인 로렌스는 마크롱의 동창이며, 변호사인 막내딸 티파니는 현재 마크롱 캠프에서 선거 활동을 돕고 있다.
전형적인 엘리트 출신인 마크롱은 고등학교 졸업 후 파리 낭테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파리정치대학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후 장관과 대통령을 대거 배출한 명문 국립행정대학원(ENA)을 졸업하면서 ‘에나케(ENA 출신을 일컫는 말)’ 반열에 들어갔다.
2004년 고위 공무원직인 재무감사관으로 재직하던 중 2008년 로스차일드 계열 은행으로 이직하면서 한때 기업금융전문가로 일했다. 비록 기업금융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었지만 4년 만에 이사에서 상무이사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던 그는 당시 총 290만 유로(약 35억 7000만 원)의 높은 급여를 받으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정계에 뛰어든 것은 2012년이었다. 올랑드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발탁됐던 그는 2014년 경제 및 산업 및 디지털 장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마크롱에게 주어진 임무는 지난 3년간 경제 성장률이 0%일 정도로 추락해 있었던 프랑스의 경제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가 선택한 개혁 방향은 친기업, 친EU였다. 경제장관 시절 그가 거둔 괄목할 만한 성과로 꼽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마크롱법’이었다.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목표였던 이 법안은 사회당인 정부를 친기업 성향으로 조정하는 정책이었다. 가령 주 35시간 근무제를 완화하고, 국제관광지구로 지정된 지역에서는 일요일 영업 및 야간 영업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친기업 성향의 이 정책은 당시 프랑스 국민들과 의회의 강한 반발을 샀으며, 전통적인 프랑스의 사회주의적 가치에 반한다는 여론 또한 강했다. 전통적인 좌익 인사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았던 것도 물론이다. 그 어떤 나라보다 엄격한 노동법이 적용되는 프랑스인들에게 이 정책은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대대적인 파업 사태가 촉발됐지만 결국 마크롱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여당인 사회당 의원들은 물론, 야당 의원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수정한 끝에 이 법안은 결국 통과됐다.
현재 마크롱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정책 역시 경제장관 시절 발의했던 ‘마크롱법’의 연장선상에 있다. 단, 친기업 정책과 함께 친복지 정책을 동시에 제안하고 있다. 현행 33.3%인 법인세를 EU 평균인 25%까지 인하하는 감세 정책과 함께 주 35시간 근무제를 완화하되, 동시에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과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마크롱은 낙관적이다.
또한 극우 성향인 르펜의 대척점에 서있는 마크롱은 주로 중도좌파 성향의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친EU이면서 이민자와 무슬림에 대해서는 포용적인 입장이다. 또한 500억 유로(약 61조 원)를 들여 직업 훈련, 신재생 에너지 발굴, 기간 시설 확대 등 공공 부문에 적극 투자할 계획이다. 이밖에도 안경, 틀니, 보청기 비용을 전액 국가에서 보조하거나, 현 9.7%인 실업률을 7%로 낮추겠다는 공약도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15세 이하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휴대전화를 소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런 마크롱의 공약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너무 기술관료적이며,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모호하고 정치적으로 정의 내리기 어렵다는 점을 약점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정치적으로 좌우 개념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이런 애매한 정책은 더욱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도 성향의 매니페스토는 너무 특징이 없고, 또한 모두의 입맛을 맞추려고 하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게 돼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르펜은 한 차례 대선 토론에서 마크롱의 발언이 끝난 후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거 아세요, 마크롱 씨. 당신은 분명 놀랍도록 유능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7분 동안 떠드는 것을 들었지만, 나는 당신의 생각이 정리가 안 되네요. 당신은 아무 것도 말한 게 없어요. 너무 공허하네요.”
중상류층 엘리트 집안 출신인 까닭일까. 한편으로는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단점으로 꼽히고 있다. 일례로 남부 프랑스의 선거 유세장에서 마크롱은 노조 활동가인 21세 청년과 이런 설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 청년은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나타난 마크롱에게 “나는 그런 양복을 살 돈이 단 한 푼도 없다”라고 비꼬았다. 그러자 마크롱은 청년을 향해 “양복을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청년은 다시 “나는 16세 때부터 일하고 있다”라고 맞받아쳤다.
마크롱의 초당파적인 정책은 특히 도시에 거주하며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층 사이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자크 아탈리는 마크롱의 많은 정책들이 당을 초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정책 구상들은 좌파 또는 우파의 것이거나, 혹은 양쪽 모두의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이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자칫하다간 양쪽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며 경고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명한 작가 겸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인 프레데릭 마르텔은 “그런 식으로라면 좌파들은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할 것이다. 또한 우파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의 이런 새로운 도전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프랑스’를 바라고 있는 프랑스인들에게 제대로 어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선 1차 투표의 결과가 그랬다. 그리고 마크롱은 1차 투표 승리 후 지지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2주 후에 제가 여러분들의 대통령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모든 프랑스 국민들의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모든 애국자들의 대통령이 되고자 합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마크롱-트로뉴 러브스토리 13년 기다림 끝 25세 연상 스승과 결혼 마크롱의 고교시절 모습. 당시 트로뉴(오른쪽)는 마크롱의 연극반 지도교사였다. 트로뉴 집안은 현재 아미앵에서 유명한 초콜릿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트로뉴 쇼콜라티에’는 마카롱으로 유명하며, 이에 아미앵 사람들은 “우리는 마카롱뿐만 아니라 마크롱도 있다!”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고 있다. 마크롱과 트로뉴가 처음 만난 것은 마크롱이 15세이던 1992년이었다. 당시 프랑스 문학과 라틴어 담당 교사였던 트로뉴는 연극반 지도 교사도 함께 맡고 있었다. 연극반에서 활동했던 마크롱과 트로뉴가 부쩍 가까워진 것은 마크롱이 16세 되던 때였다. 당시 함께 희곡을 고쳐쓰자는 마크롱의 제안에 따라 매주 금요일마다 만남을 가졌고, 그렇게 서서히 감정이 싹텄다. ‘프랑스3’ 방송국의 다큐멘터리에서 트로뉴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조금씩 나는 마크롱의 총명함에 이끌렸다. 그는 분명히 다른 학생들과는 달랐다”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르파리지앵>과의 인터뷰에서 한 동창생은 “수업 시간에 트로뉴 선생님은 늘 마크롱의 시를 예로 들곤 했다. 선생님은 완전히 그의 문학적 재능에 매료되어 있었다. 마크롱은 항상 시를 써왔고, 그러면 선생님이 큰 소리로 낭독했다”고 말했다. 그럼 언제부터 본격적인 연인 사이로 발전했을까. 이에 대해서 트로뉴는 정확한 언급은 피하고 있다. 안느 풀다의 저서 <에마누엘 마크롱: 완벽한 청년>에서 트로뉴는 “우리 사이가 언제 연인 사이로 발전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건 우리들만의 비밀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사랑을 숨길 수 없었던 마크롱은 결국 부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마크롱의 부모가 격렬하게 반대했던 것은 물론이었다. 충격에 빠졌던 마크롱의 부모는 트로뉴를 찾아가 “아들이 18세가 될 때까지만이라도 참아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트로뉴는 당시 눈물을 보이면서 “아무 것도 약속드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마크롱의 부모는 아들을 파리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한사코 반대하던 마크롱을 파리로 떠나도록 설득한 것은 트로뉴였다. 트로뉴는 마크롱에게 “나를 떠나 파리로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라”고 설득했다. 파리로 떠나기 전날 마크롱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든, 난 반드시 다시 돌아와서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파리로 떠난 후에도 둘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트로뉴는 “우리는 몇 시간씩 통화를 했다. 마크롱은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나의 저항심을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결국 트로뉴는 남편과 이혼을 하고 마크롱을 택했다. 마크롱이 18세가 되자 파리로 이주해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며, 지난 2007년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당시 마크롱의 나이는 29세, 트로뉴는 54세였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양가 친척들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으며, 그런 비난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트로뉴를 가리켜 ‘갱년기 바비인형’이라고 조롱하거나, 혹은 마크롱을 가리켜 ‘슈슈(선생님에게 사랑받는 총아)’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공개석상에서 보란듯이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언제나 아내에 대해서 당당한 마크롱은 1차 투표 결과가 발표된 직후 환호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아내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늘 같은 자리에 있어준 이 사람이 없었다면 저도 여기에 없었습니다.” 또한 캠프 참모이자 최측근인 마크 페라치는 “마크롱은 트로뉴 없이는 현재의 모험을 감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존재는 마크롱에게 절대적이다”라고 말했다. 2015년 경제장관이었던 남편을 돕기 위해서 교사직을 그만두었던 트로뉴는 마크롱이 대선에 출마한 후부터는 본격적인 보좌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는 주로 연설문에 대해 조언을 해주거나 의제를 설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가령 “당신은 목소리 톤이 특정한 단어를 말할 때면 낮아진다. 목소리를 높여야 사람들이 당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라는 식이다. 이와 관련, 마크롱의 참모인 알렉시스 콜러는 “트로뉴는 의제 회의 때 참석하곤 한다”라며 트로뉴가 마크롱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고 말했다. 만일 엘리제궁에 입성할 경우 과연 트로뉴가 어떤 영부인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마크롱은 “만일 ‘우리’가 당선된다면, 아내는 공식적인 역할과 자리를 갖고 활동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단, 무보수로 일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단지 수동적으로 보조 역할만 하는 영부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