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1년 5월 2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여사가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제1회 대통령컵 쟁탈 아시아 축구대회’ 개막식에 참석했다. 오른쪽은 장덕진 대한축구협회장. 연합뉴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 전 장관을 두고 주변에 한것으로 알려진 말이다. 장 전 장관을 질투하는 주변의 시선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라는 설도 있고, 반대로 장 전 장관이 스스로 했던 말이라는 설도 있지만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장 전 장관을 아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장 전 장관은 박 전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다. 고 육영수 여사의 언니 육인순 씨가 장 전 장관의 장모인 것. 박 전 대통령이 그를 아낀 이유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장 전 장관은 고려대 법대 졸업(1960년)을 전후로 고등고시 사법과(10회‧58년), 행정과(12회‧60년), 외무과(13회‧61년)에 모두 합격하며 ‘한국 최초 고시 3관왕’에 올라 이름을 알렸다. 1962년 재무부 사무관으로 공직에 입문, 7년 만에 재무부 재정차관보와 청와대 외자관리비서관으로 승진한 ‘엘리트’ 관료이기도 하다.
장 전 장관은 정계에도 진출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 지역구에 출마,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서울에서 당선된 유일한 여당 국회의원이었다. 반면 이때 신민당 총재 유진산이 투표일을 앞두고 돌연 영등포구 갑 지역구를 포기하면서 신민당 내부의 ‘진산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3년 8월에는 농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을 맡았다. 이후 경제기획원 차관을 거쳐 1977년 12월 농수산부 장관에 올랐다. 당시 44세였다.
# 축구에도 남다른 애정
장 전 장관은 축구에도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재무부에 축구 동호회를 만들어 4년간 공격수로 활동하며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고, 1969년엔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재임하면서 대한축구협회 이사직을 겸하기도 했다.
축구계에선 장 전 장관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축구협회 이사가 된 직후 실업 축구팀을 창단했는데, 그가 재무부 재임 시절 알게 된 시중 은행장들을 상대로 일일이 설득에 나서 1969년 한 해에만 은행축구팀 9개가 창단됐다. 당시 200여 명의 선수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고, 이들은 1983년 프로축구가 출범하기 전까지 한국 축구를 이끌었다.
1970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았다. 한 달 만에 축구발전기금 1억 원을 모아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코치를 초빙하는가 하면, 국가대표 상비군 전용 숙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특히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상해보험을 들게 했는데 역시 한국 스포츠 역사상 처음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장 전 장관은 국민체육진흥기금법을 입법화하고 국민체육진흥재단도 설립했다. 재단 기금은 선수와 지도자 육성, 은퇴 선수의 생활 보조금으로 지급됐다.
# 장 전 장관의 ‘꿈’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후 장 전 장관은 한동안 야인생활을 했다. 그러다 1984년부터 농업진흥공사 이사장을 역임하는데, 이 시기 이후 장 전 장관의 운명이 크게 달라진다.
당시 장 전 장관은 인구분산, 해외영토 확장, 식량안보 구축이라는 군사정권의 기조 아래 ‘해외 식량기지 구축’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때 장 전 장관이 주목한 곳은 중국 흑룡강(黑龍江)성 삼강평원 일대다. 이곳은 만주 우수리강, 송화강, 흑룡강 등 세 개의 강물이 만나면서 쌓인 퇴적층과 유기물들이 혼합된 비옥한 옥토로, 현재까지도 유럽 동부의 우크라이나, 미국 중서부 평야 지대와 함께 세계 3대 흑토(黑土) 지대, 즉 농업의 최적지로 꼽힌다. 장 전 장관은 “이 일대를 개발해 해외 식량기지로 만들자”는 당시 농업진흥공사(현 한국농촌공사) 사외이사였던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개발 추진에 적극 나섰다.
농림수산부 장관 시절의 장덕진 전 장관(왼쪽). 연합뉴스
이 회사 이사장에 취임한 장 전 장관은 흑룡강성 지방 정부와 각각 31억 1647만 원씩 출자해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중국 하얼빈시 삼강평원 일대 3만 8000㏊(서울 여의도 면적 130배)를 40년간 임대하기로 했다. 계약에는 중국 정부와 각각 산출물량의 50%를 현물로 나눠가지는 파격적인 조건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장 전 장관이 확보한 토지는 비가 오면 물이 빠지지 않아, 배수를 위해 대수로를 새로 만드는 등 큰 비용을 들여야 했다. 구불구불한 토지와 밭을 논으로 바꾸기 위한 대단위 경지정리에도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장 전 장관은 한국과 중국 은행은 물론, 국내 기업에서도 자금을 모았다.
1년 뒤인 1991년 장 전 장관의 대륙개발은 전체 면적 중 1차분으로 1만 3200㏊를 개간에 성공하고 콩 2975톤, 밀 3225톤을 생산했다. 그런데 문제는 1996년 외환위기와 함께 불거진다. 추가 투자를 위해 한국수출입은행에서 대출을 약속했던 2200만 달러 자금 조달에 비상등이 켜지면서부터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대통령직을 걸고 쌀 수입 개방을 막겠다”고 공약했는데,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으로 이를 지킬 수 없게 돼 공식 사과까지 한 상황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농업정책을 설계하는 역할을 장 전 장관에게 맡아달라고 했지만, 당시 그는 삼강평원 개발에 자신의 전 재산과 노력을 투입하고 있던 상황이라 맡지 못했다.
그가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하자, 정부의 반응이 차가워졌다. 수출입은행으로부터 지원받기로 한 2200만 달러는 청와대의 말 한 마디로 대출이 중단됐고, 학계와 정치권도 일본 고문서를 근거로 “겨울에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곳에서 돈만 낭비한다”며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결국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장 전 장관은 사채에도 손을 댔다가 210억 원에 달하는 부채만 안고 사업에서 철수했다. 이후 장 전 장관의 말년은 사업 실패로 인한 채무 관계로 순탄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8년, 중국 정부는 국제 쌀값이 폭등하자 과거 장 전 장관이 작성한 계획서대로 삼강평원일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은 “중국의 쌀 창고”로 불리며 북쪽의 거대한 곡창으로 변했다. 이곳의 평균 쌀 수확량은 한국 전체 수확량보다 높다. 장 전 장관의 사업 계획을 중국 정부가 그대로 이어 받았고, 현실화했다.
1994년, 장 전 장관은 삼강평원에서 ‘첫 삽을 뜨는’ 기공식 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 경제를 이끌어 가는 동북아경제권을 만드는 것이 필생의 꿈이며, 이를 위해 삼강평원이 초석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죽어서도 삼강평원 농장 뒤편에 이미 마련해둔 자리에 묻힐 생각입니다.” 장 전 장관의 ‘꿈’은 10년 앞을 내다보지 못한 정부와 학계, 정치권에 의해 이뤄지지 못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