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를 이끄는 힐만 감독의 리더십은 올 시즌 초반 야구계 최고 화제 가운데 하나다. 개막 후 연패에 빠졌던 SK가 무서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더 그렇게 됐다. 경기 전 감독이 직접 배팅볼을 던지면서 타자들의 훈련을 돕는 모습까지 집중 조명될 정도다. 지시보다는 대화와 질문을 중요시하는 힐만 감독의 특성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성패는 앞으로 한국 프로야구 더그아웃의 문화를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요소다. 새로 온 외국인 감독의 행보 하나하나에 야구계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 외국인 감독의 선구자, ‘노 피어’ 로이스터
KBO리그 외국인 감독의 선구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로이스터 감독이다. 로이스터 감독 이전에 순수 일본인인 도이 쇼스케(한국 이름 도위창)가 1990년 시즌 막바지 롯데 감독대행을 맡아 24경기를 지휘한 이력이 있다. 그러나 대행이 아닌 정식 감독으로 외국인이 부임한 것은 로이스터 감독이 역대 첫 사례다.
로이스터 감독. 일요신문 DB
선수들은 로이스터 감독을 만나 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로이스터 감독은 더그아웃에 있는 흰색 칠판에 ‘노 피어(No Fear)’라는 단어를 적어놓고 두려움 없는 플레이를 독려했다. 투수는 홈런을 맞아도 좋으니 자신 있게 몸 쪽 승부를 하고, 타자는 삼진을 당해도 좋으니 마음껏 자신의 스윙을 하고, 주자는 도루에 실패해도 좋으니 이때다 싶으면 언제든 뛰라는 메시지였다. 실제로 롯데 선수들은 그렇게 했고, 결과가 좋아졌다. 선수가 감독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더그아웃에서 감독의 어깨를 주무르는 장면도 종종 눈에 띄었다. 감독과 선수가 수직이 아닌 수평적 관계를 맺은 것이다. 로이스터 감독은 포스트시즌 진출 후 한복을 입고 ‘부산 갈매기’를 부르는 퍼포먼스도 펼쳤다. 한국 야구에 최적화된 외국인 감독으로 보였다.
그러나 약점이 점점 눈에 띄었다. 지나치게 정면승부를 강조하다보니, 아시아 야구의 특징인 섬세함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승리를 위해 단 한 점이 필요한 순간에도 무조건 강공으로 밀어 붙이다 기회를 놓치는 일이 생기곤 했다. 무엇보다 포스트시즌에서 ‘닥공(닥치고 공격)’ 야구의 허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내일이 없는’ 포스트시즌에서도 정공법만을 추구했다. 롯데는 로이스터 감독이 재임한 3년 내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한 번도 다음 시리즈로는 올라가지 못했다. 2008년에는 1승도 못 한 채 가을 야구를 끝냈고, 2009년에는 1승 후 3연패, 2010년에는 2승 후 3연패로 탈락했다. 로이스터 감독은 롯데를 더 이상 포스트시즌 진출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팀으로 올려놓았지만, 동시에 그와 함께라면 우승까지 가기는 어렵겠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결국 3년 뒤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보여준 메이저리그식 리더십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여러 팀에서 수많은 감독이 교체되는 동안, 로이스터 감독도 종종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 외국인 아닌 한국인, 재일교포 감독 계보
재일교포는 ‘재일본 한국 교포’의 준말이다. 일본에 살거나 영주권을 갖고 있는 한국인을 뜻한다. KBO는 교포들을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간주한다. 한국 국적을 갖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재일교포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도 한국 프로야구 지휘봉을 잡은 재일교포 감독들이 있었지만, 외국인 감독이 아닌 한국인 감독으로 분류했다.
재일교포 감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김성근 한화 감독이다. 김 감독은 1982년 프로야구 OB의 투수코치로 한국 프로야구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 1984년 OB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프로야구 감독으로서의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1984년부터 5년간 OB, 1989년부터 2년간 태평양, 1991년부터 2년간 삼성, 1996년부터 4년간 쌍방울, 2001년부터 2년간 LG, 2007년부터 5년간 SK 감독을 각각 역임했다. 2015년부터는 한화 감독을 맡고 있다.
김성근 감독 이전에는 김영덕 감독이 재일교포 감독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1982년부터 2년간 OB 감독을 지낸 뒤 1984년부터 3년간 삼성, 1988년부터 6년간 빙그레 감독으로 활약했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감독 500승과 700승 고지를 밟았던 인물이다. 1960년대 실업야구 투수로 활약하던 시절, 일본에서 배워온 슬라이더를 한국 야구에 전수한 선구자로도 알려져 있다.
송일수 두산 전 감독. 두산 베어스 제공
정식 감독은 되지 못했지만, 감독 대행을 거쳐 간 인물도 있다. 1983년 5월부터 삼성 감독대행을 맡은 이충남이 대표적이다. 삼성은 당시 서영무 감독을 견제하기 위해 오른팔 격이던 임신근 투수코치를 해고하고 재일교포 이충남을 수석 코치로 영입했다. 결국 서 감독이 개막 한 달 만에 사임하면서 이충남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치르게 됐다. 사실상 한 시즌을 감독으로 지낸 셈이다. 그러나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해 일본인 감독과 다름없었다는 점이 팀 안팎의 반감을 샀다. 결국 정식 감독으로는 임명되지 못했다.
다만 2014년 두산 감독을 맡았던 송일수 감독은 앞서 언급된 감독들과 케이스가 다르다. 엄밀히 따지자면, 역대 네 번째 재일교포 출신 감독이자 역대 두 번째 ‘외국인 감독’으로 분류된다. 부모는 한국인이지만, 그는 결혼 후 일본 국적을 취득해 엄연한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일본 이름은 이시야마 가즈히데. 1970년 긴테쓰에 입단해 1983년까지 주로 백업 포수로 뛰었다. 1984년 한국으로 건너와 삼성에 입단한 뒤 재일교포 투수 김일융의 전담 포수로 활약했다. 현역 은퇴 후 긴테쓰 배터리 코치와 라쿠텐 스카우트를 역임하다 2014년 두산 2군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한국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 2015년 김진욱 감독의 후임 사령탑으로 깜짝 발탁돼 야구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충남 감독대행과 마찬가지로 한국어가 서툴러 코치들이나 선수들과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한국 야구에 다시 적응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포스트시즌 단골팀이던 두산은 그해 정규시즌 6위로 내려앉았고, 송 감독은 1년 만에 다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 힐만 감독, 다시 성공 사례 쓸까
힐만 감독은 역대 외국인 감독 가운데 가장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뉴욕 양키스 마이너리그팀 감독을 하다 2003년 니혼햄 사령탑을 맡으면서 1군 감독으로 데뷔했다. 2007년까지 지휘봉을 잡았고, 그 사이 2006년 니혼햄을 44년 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일본에서 다섯 시즌 통산 351승 14무 324패를 기록했다.
일본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2008년 메이저리그 캔자스시티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해 캔자스시티는 지구 4위에 올라 5년 만에 꼴찌를 벗어났다. 그러나 2009년 다시 공동 최하위로 추락한 뒤 2010년 시즌 초반에도 성적이 좋지 않자 결국 해임됐다.
힐만 감독. 사진 출처=SK 와이번스 홈페이지
일본 야구를 경험했기에 아시아 야구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힐만 감독 영입에 공을 들인 민경삼 전 SK 단장도 이 부분을 높이 샀다. 로이스터 감독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메울 만한 인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야구 관계자들은 “메이저리그식 선 굵은 야구에 세밀함까지 접목시킨 스타일”이라고 호평하고 있다. 다양한 시프트와 작전을 활용해 상대팀에 맞서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특히 4월 21일 인천 두산전에서 4-4로 맞선 8회말 깜짝 스퀴즈 번트로 역전 점수를 뽑으면서 견고한 두산 내야 수비를 무너뜨린 장면은 많은 박수를 받았다. 힐만 감독은 “익숙지 않은 플레이를 선수들이 잘 실행해줬다”며 “앞으로도 득점 기회에서 다양한 플레이를 시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찬사들이 ‘메이저리그 출신’ 감독에 대한 환상에서 나왔다는 지적도 있다. 한 야구인은 “사실 그런 장면은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종종 나왔다. 특히 기습적인 스퀴즈 번트로 점수를 뽑고 흐름을 가져오는 작전은 김재박 감독이 현대 시절에 자주 했다”며 “아무래도 주체가 낯선 외국인 감독이라 더 관심과 찬사를 받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야구인도 “힐만 감독의 시프트가 이전에 나온 다른 시프트보다 월등히 뛰어나거나 특별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며 “그보다는 오히려 정의윤이 홈런을 치고 감독을 주먹으로 치는 세리머니를 하는 것처럼 선수들이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 부분을 더 높이 사고 싶다”고 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도위창을 아십니까? 일 타격기술 전수해 롯데 우승에 한몫 도위창이라는 이름은 이제 초창기 프로야구 팬들에게만 익숙하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그는 한국 프로야구에 확실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90년 시즌 도중 롯데 감독대행을 맡으면서 최초로 순수 외국인이 한국에서 프로야구단 지휘봉을 잡는 사례를 남겼다. 그의 본명은 도이 쇼스케(土居章助). ‘도위창’이라는 이름 때문에 재일교포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한국계가 아닌 일본인이다. 한국식 이름은 롯데에 코치로 부임하면서 스스로 지은 KBO 등록명이다. 도위창은 일본 고치 현 출신으로, 1956년 고쿠테쓰에 입단하면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59년과 1960년에는 주전 유격수로도 활약했다. 이후 요미우리와 다이마이를 거쳤고, 1963년 8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일본 프로야구 통산 526경기에 출장했다. 1964년부터 다이마이가 롯데 오리온스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는 1972년부터 롯데 코치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5년 한국의 롯데가 실업야구단을 창단하면서 자매구단 격인 일본의 롯데에 일본인 코치 파견을 요청했다. 도위창이 한국 파견 코치로 낙점됐다. 한국 야구와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였다. 이때만 해도 도이 쇼스케라는 본명을 썼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실업야구단 롯데가 해체되자 그는 7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2년 만인 1984년 다시 프로야구 롯데가 도위창에게 손짓을 했다. 1983년 시즌 직후 감독으로 취임한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이 한국 지도자 경험이 있는 도위창에게 입단 의사를 타진한 것이다. 한국에 애정이 깊었던 도위창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국식 이름도 그때 스스로 만들었다. 도위창은 당시 한국보다 수준이 한참 높았던 일본 프로야구의 타격 기술을 롯데 선수들에게 전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롯데는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는데, 강병철 감독이 훗날 “그해 우승에는 도위창 코치의 역할이 무척 컸다”고 말한 적도 있다. 1986년 강 감독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한 시즌 더 성기영 감독을 보좌하며 코치 생활을 했다. 그 후 2년간 일본 롯데로 복귀하기도 했지만, 1990년 다시 한국으로 유턴해 수석 코치를 맡았다. 바로 그해 롯데 사령탑이었던 김진영 감독이 시즌 도중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퇴했다. 그러자 롯데는 수석 코치였던 도위창을 감독대행으로 임명해 남은 시즌을 치렀다. 시즌이 끝난 뒤에는 도위창을 차기 감독으로 앉히려는 계획도 세웠다. 좋은 선수를 발굴하고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데 능력을 보였기에 감독으로서 무척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어에 능해 선수들과 의사소통도 잘됐고, 동료 한국인 코치들과도 잘 어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야구 규약에 외국인 감독 제한 규정도 없었다. 그러나 국내 정서에 대한 부담이 문제였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 감독, 특히 일본인 감독은 구단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실업 야구 시절부터 롯데를 지켰고, 한국 이름까지 지을 정도로 한국 야구에 애정이 많았던 인물이지만, 역시 국적이 발목을 잡았다. 1983년 삼성이 재일교포 이충남을 감독대행으로 앉혔을 때 팬들의 반응이 싸늘했던 점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롯데는 강병철 전 감독을 다시 선택했다. 도위창으로 더 유명했던 일본인 도이 쇼스케는 그렇게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외국인 감독으로 정식 부임할 기회를 놓쳤다. 능력은 출중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났다. 얼마 후 도위창이라는 한국 이름을 내려놓고 한국을 떠났다. 이후 1993년부터는 대만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 1997년을 마지막으로 야구계와 작별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과 일본, 대만에서 모두 지도자로 활동한 흔치 않은 경력의 소유자다. 올해 만 80세 고령인 그는 2011년 9월 한국에서 방송된 고 최동원 추모 다큐멘터리에 건강한 모습으로 등장해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