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2군 훈련장이 있는 익산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임의탈퇴 신분이 됐던 김상현. 검찰은 그에게 기소유예처분을 내렸지만 그는 야구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임의탈퇴가 해제되는 오는 7월까지 프로선수로 뛸 수 없기 때문이다. 김상현은 오해를 살 만한 행위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부분에 깊이 반성하면서도 여전히 억울한 부분이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독립리그에서 뛰고 있는 만큼 지금은 야구에만 집중하겠다는 생각도 밝혔다. 그동안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피했던 김상현을 어렵게 만났다.
지난 4월 27일, 구리 한강시민공원에 위치한 인창고 야구장에선 저니맨 외인구단 선수들이 오전 훈련을 소화하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잔디 대신 울퉁불퉁한 돌멩이와 흙으로 뒤덮인 그라운드는 수비 훈련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선수가 16명밖에 안되다 보니 연습경기를 제대로 치르기 어려웠지만 선수들의 훈련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고, 열정적이었다. 이윽고 배팅게이지 옆에서 연신 타격폼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김상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이지 안에 들어선 김상현은 계속 홈런성 타구를 양산해냈다. 김상현의 타격을 지켜보는 선수들 입에선 절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오전 9시30분부터 시작한 훈련은 12시30분경에 마무리됐는데 선수들 훈련은 ‘대충’과 ‘적당히’가 용납되지 않았다. 훈련을 마친 김상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상현은 언젠가 올 프로팀 복귀 기회를 잡기 위해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의지를 밝혔다.
―운동장 시설이 너무 열악한 것 같다. 그라운드가 흙으로 돼 있어 부상 위험도 커 보이고.
“원래 이곳은 인창고 야구부가 사용하는 훈련장이다. 오전에는 야구부원들이 수업에 참여하느라 야구장을 사용하지 않아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빌려 쓰기로 했다. 야구장 시설이 좋지 않지만 이렇게 훈련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 일 이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힘들었다.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야구를 못하게 된 현실이 정말 안타까웠다. 가족들도 큰 상처를 받았다. 억울한 마음이 큰 나머지 살짝 우울증 증세도 나타났었다. 그래도 야구를 놓기 어려웠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야구이고, 이렇게 그만둘 수 없다는 생각에 개인 훈련에 몰두했다. 그러다 저니맨 외인구단 감독을 맡고 있는 (최)익성이 형을 만난 것이다. 내가 투수라면 캐치볼만 하면 되지만 야수이다 보니 타격 훈련도 해야 하고, 투수의 공도 봐야 하는 등 팀 훈련이 중요한 상황에서 최익성 선배가 독립리그를 준비 중이니 함께 해보자고 말씀해주셔서 저니맨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이다.”
―독립리그 출범을 앞두고 얼마나 연습을 한 건가.
“2월부터 전지훈련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사실 다른 독립리그 팀으로부터 입단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저니맨 팀이 비교적 이른 시기인 2월부터 전지훈련을 시작하는 게 하루라도 운동을 빨리 하고 싶었던 내 상황과 잘 맞아떨어졌다.”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독립리그의 환경이 프로 시절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렸을 때 처음 야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적응해가려고 노력했다. 그때도 흙바닥에서 야구했고, 시설이 열악했다. 사실 여기선 내가 하는 야구도 중요하지만 후배들을 돕는 것도 중요하다.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생들 중에서 프로에 지명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독립리그에서 활약하는 편인데 이 선수들이 좋은 성장을 이뤄 프로에 들어가는 걸 목표로 뛰는 중이다. 그 친구들에게 내가 미미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김상현은 독립리그 시설은 열악하지만 훈련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밝혔다.
인터뷰 진행 중에 오전 수업을 마친 인창고 야구부가 훈련장에 도착했다. 연습경기가 있는지 다른 고등학교 야구부도 함께 모였다. 김상현은 순식간에 고교 야구 선수들로 북적이는 야구장을 바라보며 이런 얘기를 곁들였다.
“이렇게 많은 선수들이 모두 프로 진출을 꿈꿀 텐데 그들을 뽑는 ‘직장’은 10개 구단밖에 없다. 지명 받지 못하는 수많은 선수들에게 독립리그는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현재 3개팀으로 출범했지만 적어도 6개팀은 돼야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독립리그도 합숙 같은 게 있나.
“현재 우리 팀 선수가 16명인데 어린 선수들은 대부분 지방 출신이라 서울에 연고가 없다. 구리에 작은 숙소를 마련해서 직접 밥도 해먹고 빨래도 하며 지낸다. 물론 난 가족들이 있는 수원에서 출퇴근하지만 가끔은 후배들과 함께 숙소에서 생활할 때도 있다.”
―나이 어린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며 느낀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젊고 어리다는 건 의욕과 열정이 샘솟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야구는 의욕과 열정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요즘 선수들 훈련을 지켜보며 기본기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이들이 프로에 가지 못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기본기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야구를 잘못 배운 선수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캐치볼 하는 자세, 타격폼, 수비할 때의 동작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프로에 들어가서도 적응하기 어렵다. 후배들에게 그런 얘기들을 가장 많이 해주는 편이다.”
―2001년 해태(KIA) 타이거즈에서 프로 데뷔 후 지난해 7월 전까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팀 소속 선수로 뛰며 야구인생의 스펙트럼을 확장해나갔다. 프로팀이 아닌 곳에서 야구하는 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궁금하다.
“이전에 은퇴한 선배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었다. 선수로 뛸 때 잘하라고. 아직 은퇴한 건 아니지만 밖으로 나와 보니 내가 누리고 경험했던 모든 부분들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먹고 싶은 것 먹고, 좋은 숙소에서 잠을 자고, 시설 좋은 야구장에서 경기하면서 팬들의 함성 속에 살아갔던 그 시절이 눈물겹도록 그립다.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절감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고. 독립리그에서 활약하며 더 간절해졌다. 이전 내가 있던 자리로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김상현은 같이 훈련하고 있는 후배들에게도 힘을 보태고 싶다고 밝혔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다시 김상현의 프로필을 확인했었다. 해태에서 KIA로 팀명이 바뀐 이후 LG로 트레이드된 그는 다시 KIA-SK-kt로 팀을 옮겼다. 그리고 프로필 마지막에는 현재 그가 뛰고 있는 ‘저니맨 외인구단’이 적혀 있다. 그의 야구인생이 ‘저니맨’이란 단어와 절묘하게 얽혀 있는 듯했다.
―오는 7월이면 구단에서 묶어 놓은 임의탈퇴가 해제된다. kt로부턴 어떤 접촉이나 연락이 없었나.
“아직 연락받은 건 없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언젠가 주어질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야구하는 것밖에는 없다. 내가 있었던 자리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충분히 느꼈고, 아팠던 터라 다시 그 기회를 얻으려면 내가 노력해야 한다. 구단의 결정은 내 의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김상현은 그 일 이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녔다고 말한다. 길을 걷다가 모르는 사람과 우연히 눈이라도 마주치면 자신을 알아본 이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김상현을 잡아준 이는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가족들도 김상현 못지않게 힘든 상황을 겪었지만 김상현 혼자가 아닌 같이 그 옆에서 위로를 주고 위안을 받았다.
김상현이 다시 프로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일부에선 그에게 가해진 벌이 다른 사건의 연루자에 비해 너무 가혹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지도 모른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