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텔레그래프>의 음악평론가인 닐 맥코믹의 말처럼, “(영국) 사회엔 록스타는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하지 않는 이상한 관행”이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게리 글리터는 그런 관행을 최대한 악용한 인물이다. 사실 그는 2012년 ‘유트리 작전’이 시작되어 영국 전역에서 셀러브리티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수사가 펼쳐지기 전부터,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켰던 인물이다.
1944년생인 그는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로커였다. 번쩍이는 의상과 메이크업, 플랫폼 부츠, 에너지 넘치는 무대 매너는 ‘글램 록’ 혹은 ‘글리터 록’에 안성맞춤인 퍼포먼스였고, 아예 자신의 이름 자체를 ‘게리 글리터’로 개명했으니 그는 이 장르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었다. 총 2000만 장 이상의 판매고에 수십 곡의 히트 넘버를 기록한 그는 펑크 록, 뉴 웨이브, 고딕 록 등에 영향을 주었고 ‘퀸’의 프레디 머큐리를 비롯한 수많은 후배들의 롤 모델이기도 했다.
영국 7080 글램록의 대표 뮤지션이었던 게리 글리터는 90년대 이후 영국 안팎에서 아동 성범죄 문제로 악명을 떨쳤다.
뮤지션으로선 칭송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범죄자였고 그 역사는 오래된 것이었다. 발단은 고장 난 컴퓨터였다. 1997년 그는 자신의 노트북에 문제가 생기자 수리점에 맡겼는데, 엔지니어는 그의 하드 드라이브에서 이상한 것들을 발견한다. 포르노 동영상과 사진들이 수천 점 있었던 것. 정상적으로 유통되는 것이었다면 문제될 것은 없었겠지만, 그것은 모두 아동 포르노였다. 엔지니어는 게리 글리터를 경찰에 신고했고, 1999년 그는 4개월 형을 언도 받아 복역한다.
해프닝도 있었다. 앨리슨 브라운이라는 30대 여성은 자신이 14살 때 글리터에게 강간을 당한 뒤 수년 동안 성적 착취를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알고 보니 방송사에서 돈을 받고 한 거짓 제보였다. 한편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스피이스 걸스의 영화 <스파이스 월드>(1997)에 출연했지만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무자비하게 삭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복역 이후 당국은 그를 성범죄자 명단에 올렸고, 이젠 더 이상 영국에서 활동하기 힘든 상황이 된 글리터는 요트를 몰고 스페인을 통해 쿠바로 갔다. 하지만 쿠바 당국은 글리터의 성범죄 전력을 문제 삼아 입국을 금지했고 그는 태평양을 건너 캄보디아로 간다.
결국 그는 3년 형을 선고 받았고, 복역을 마친 후 베트남에서 추방될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부정했다. 자신은 18세 이상의 성인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미성년자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었다. 단호하게 “나는 아동성애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언론의 선정주의에 의해 모든 것이 부풀려졌다고 하소연했다. 이후 상고를 거쳐 3개월로 감형되어 2008년에 출소한 게리 글리터는 인근의 19개국으로부터 입국 금지 대상 선고를 받았고, 결국 2008년 8월 11일에 영국의 히드로 공항으로 돌아온다. 8년 만의 귀국이었다.
이젠 끝난 걸까? 아니었다. 2012년에 ‘유트리 작전’이 시작되면서, 그때까지도 감춰져 있던 그의 추악한 과거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한참 잘나가던 1970년대, 그는 틴에이저도 되지 않은 소녀들을 분장실로 유인해 음란한 짓을 일삼았다. 2015년 법원은 그가 세 명의 아동을 대상으로 강간 미수 1건과 음란 행위 4건을 저질렀다고 확정했다. 죄질은 매우 나빴다. 쾌락을 위해 미성년자를 성적 노리개로 대한 것이며, 반성의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이 오해라며 2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으로부터 기각당했다.
일세를 풍미했던 록스타였고, 언젠가는 컴백할 거라고 재기의 의지를 불태우던 게리 글리터. 하지만 그는 영국인들에게 증오와 수치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2015년 16년 형을 선고 받은 후 현재 복역 중이다. 만기 출소할 때는 그의 나이 87세. 2008년부터 심장 질환을 앓고 있는 그가 그때까지 자신의 죗값을 치를 수 있을진 모르겠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