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지난 4월 27일 지주회사로 전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박정훈 기자
지주회사법은 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 정부가 대기업의 순환출자를 막고 복잡한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됐다. 그러나 지주회사 체제에서는 대주주의 지배력 확보와 상속이 용이하다는 특성이 있다. 이 때문에 경영권 승계와 상속 문제가 걸려 있는 대기업들의 지주회사 전환 가능성이 전망됐다. 특히 지주회사 전환 시 적용되는 특혜를 줄이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공산이 커지면서 대기업들의 지주회사 전환 움직임이 바쁠 것으로 예상됐다.
현재 상법 369조에 따르면 회사가 가진 자사주에는 의결권이 없다. 하지만 인적분할 방식으로(주주 보유 지분율대로 신설법인 주식을 나눠 갖는 것) 지주회사와 자회사를 분리하면 자사주의 의결권이 부활한다. 지주회사의 자사주는 여전히 의결권이 없지만 분할된 자회사의 신주에는 의결권이 생기는 것. 이른바 ‘자사주의 마법’이다.
현재 국회 계류 중인 상법·공정거래법·법인세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자사주의 마법이 차단된다. 또 7월부터 공정거래법개정안이 시행되면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업 규모 기준이 자산 1000억 원에서 5000억 원으로 상향된다. 매일유업, 오리온 등 기업이 이 같은 기준 상향에 앞서 인적분할을 추진하며 지주회사 체제 전환에 나서고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지주회사로 전환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지배구조 개편이 필요한 기업들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 고민한 결과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해 지주회사 전환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울러 자사주(자기주식) 2121만 1379주(13.15%)를 전량 소각한다고 밝혔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지배주주를 비롯한 주주들의 보유 주식 가치가 높아진다.
삼성전자의 예상 밖 결정에 대해 재계 일부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을 앞두고 삼성이 오너 일가의 지배력 강화에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다. 하지만 예견된 결정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미 한참 전에 지주회사 전환 포기가 결정됐고 발표 시기만 고민하고 있던 것으로 안다”며 “삼성물산과 삼성생명 실적이 좋지 않아 지주회사 전환을 포기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롯데그룹은 지난 4월 26일 롯데제과·롯데쇼핑·롯데칠성음료·롯데푸드 4개 사 이사회를 열고 지주회사 전환을 위한 기업분할과 합병을 결정했다. 각 기업은 사업부문과 투자부문으로 인적분할하는데, 사업부문은 기존 사업을 전개하고 투자부문은 지주사로 편입된다. 롯데는 롯데제과투자회사를 중심으로 각 투자부문을 합병,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다. 롯데의 이 같은 계획은 오는 8월 29일 주주총회에서 최종 승인될 예정이다.
그간 롯데그룹은 복잡한 지배구조와 얽히고설킨 순환출자 고리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지배구조를 단순화하고 투명경영을 하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 한국에 롯데지주회사를 설립, 국적 논란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재계에서는 롯데그룹이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데 드는 비용이 적어도 5조 원 이상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지주회사 전환 이후에도 남은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해야 하는 등 변수가 많다”며 “금융계열사 지분도 처리해야 하는데 2년의 유예기간이 있기 때문에 비용 문제로 지주회사 전환 무산을 속단하면 안된다”고 설명했다.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에 재계 이목이 집중된다. 최준필 기자
현대차그룹의 행보도 관심사다. 순환출자 형태의 지배구조를 갖고 있는 데다 정몽구 회장의 나이를 감안하면 경영권 승계 문제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이 6.96%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현대모비스가 현대자동차 지분 20.78%를 보유하고, 현대자동차가 기아자동차 지분 33.88%를, 기아자동차가 다시 현대모비스의 지분 16.88%를 보유하는 순환출자 구조를 띠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 지주회사는 현대모비스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대모비스는 기아자동차가 16.88%, 정몽구 회장이 6.96%, 현대제철이 5.66%, 현대글로비스가 0.67%의 지분을 갖고 있다. 정의선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서는 순환출자구조의 정점에 있는 현대모비스 지분 확보가 필수적이다. 정 부회장은 보유하고 있는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팔아 지주사 지분을 확보해 경영권을 승계할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지난 3월 17일 현대차가 현대제철과 현대글로비스에서 현대차그룹 브랜드 사용료를 받겠다고 공시하면서 새로운 지주회사 전환 시나리오가 급부상했다. 통상 지주회사가 자회사에서 브랜드 사용료를 받는 것을 생각할 때 현대차그룹의 지주회사로 ‘현대자동차’가 그 정점에 서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아직 지주회사 전환과 관련된 발표를 하지 않았다. 현대차 한 관계자는 “현재 지배구조가 선진화되지 않아서 새 정부 방향이나 정책에 따라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록 그룹 전체로 볼 때 지주회사 체제를 갖춰놓고 있지만 SK그룹도 핵심계열사인 SK텔레콤과 SK하이닉스에 대한 재편 작업이 남아 있다. SK하이닉스는 SK텔레콤의 자회사로, 지주사인 SK㈜의 손자회사다. 성장성이 높은 알짜 계열사를 SK텔레콤이 아닌 SK㈜가 직접 지배함으로써 SK그룹은 하이닉스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또 현행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의 손자회사는 지분 100% 소유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증손회사를 만들 수 있어, 하이닉스가 공격적으로 인수합병(M&A)에 나서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최태원 SK그룹 회장 입장에서는 하이닉스를 자회사로 편입시키면 배당 이익을 늘릴 수 있다.
SK그룹 관계자는 “SK그룹은 이미 지주회사가 있는 상황이어서 순환출자 구조를 띠고 있는 다른 기업과 상황이 다르다”며 “IB업계에서 중간지주회사 설립 추측이 나왔지만 현재로서는 계획이 없다”고 설명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