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KBO 리그에서 뛰던 외국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재도전하는 일은 그동안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던 장면이다. 다만 대부분 메이저리그행을 보장받지 못한 채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 구단과 재계약을 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미국행 비행기에 다시 올라야 했던 케이스도 많다. 그러나 테임즈는 다르다. 최고의 대우를 받고 건너가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다. 한국에서 보낸 3년 동안 테임즈는 실패한 마이너리거에서 메이저리그 정상급 타자로 성장했다.
# 한국에서의 3년, 테임즈의 가치를 어떻게 바꿨나
한국에 오기 전 테임즈는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유망주였다. 2008년 토론토에 지명돼 프로생활을 시작한 뒤 2011년 처음으로 메이저리그로 승격돼 95경기에 출전했고 홈런 12개를 쳤다. 그러나 2012년 들어 급격한 부진에 빠지면서 결국 시애틀로 트레이드됐다. 이후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 휴스턴으로 이적했고, 2013시즌을 끝으로 방출됐다. 테임즈가 밀워키와 계약한 뒤 현지 언론이 “팬들은 여전히 그를 토론토의 플래툰 외야수로 기억하고 있다”고 썼을 만큼 2012년 이후의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그가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온 이유다.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맹활약 중인 에릭 테임즈. 연합뉴스
그러나 NC와 계약하고 한국에 온 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중심 타자로 꾸준히 출전하기 시작하면서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세 시즌 동안 통산 타율 0.348에 홈런 124개, 379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2015년에는 KBO 리그 사상 최초로 40홈런-40도루 클럽에 가입하면서 정규시즌 MVP에 올랐다. 2016년에도 홈런 40개를 넘겨 2년 연속 40홈런도 달성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지난해 말 밀워키는 테임즈와 3년 총액 1600만 달러(약 181억 원)라는 엄청난 금액에 계약했다. 2020년 구단 옵션이 포함돼 실질적인 계약 기간은 3+1년. 바이아웃 금액이 100만 달러, 연도별 타석별 옵션이 50만 달러다. 2020년 구단 옵션이 발효될 경우 계약상 최대 2450만 달러(약 277억 원)를 받을 수 있다. 당장 올해 받는 연봉이 400만 달러(약 45억 원)다. 지난해 NC에서도 125만 달러라는 높은 연봉을 받았지만, 올해 연봉은 그 금액의 세 배를 넘는다. 3년간 테임즈가 한국에서 보여준 활약의 가치를 그 정도로 평가받은 것이다.
격세지감이다. 1999년 롯데에서 최고 타자로 군림했던 펠릭스 호세는 2000년 뉴욕 양키스로 돌아가면서 마이너리그 계약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호세에 대해 “메이저리그 복귀는 하루짜리에 그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 프로야구 최고 외국인 타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호세는 그해 양키스에서 20경기를 뛰면서 딱 한 경기에서만 선발 출장 기회를 얻었다. 18년 전 한국 야구에 대한 빅리그의 평가는 그 정도였다.
테임즈는 다르다. 밀워키는 테임즈 영입 발표 하루 전 1루수 크리스 카터를 양도 선수로 지명했다. 사실상 방출의 전 단계다. 하루 뒤 그 이유가 드러났다. 테임즈를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에 넣으려면 비어 있는 자리 하나가 필요했기 때문. 카터는 지난해 홈런 41개를 날린 내셔널리그 홈런왕이다. 테임즈가 그런 카터를 밀어내고 로스터 한 자리를 꿰찼다. 밀워키는 홈런은 많이 치지만 타율이 2할대 초반에 머문 카터 대신, 한국에서 정확성과 파워를 확실하게 입증한 테임즈를 선택했다. 테임즈의 올 시즌 연봉은 팀 내에서 세 번째에 해당한다. 연봉 총액이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가운데 21위에 머물러 있는 밀워키로서는 엄청난 투자였다.
KBO리그 NC 다이노스 시절의 에릭 테임즈. 사진제공=NC 다이노스
테임즈에게 관심을 보인 구단은 밀워키뿐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NC가 경기를 치른 여러 구장에는 테임즈를 보기 위해 미국과 일본 스카우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계약 전까지도 여러 구단들이 테임즈 영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현지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는 테임즈의 메이저리그 복귀 소식을 전하면서 “KBO 리그는 보통 일본 프로야구보다 아래, 마이너리그 트리플 A 수준으로 여겨진다”고 평가했지만, 아시아 지역 담당 스카우트를 따로 두지 않은 밀워키가 테임즈 영입전에서 성공했을 정도로 KBO 리그에 대한 인식은 이미 광범위하게 달라져 있었다.
실제로 테임즈는 메이저리그에서 기대만큼, 아니 그 이상의 활약을 해냈다. 4월 한 달 동안 24경기에 출전해 타율 0.345, 홈런 11개, 19타점을 기록했다. 출루율은 0.466, 장타율은 0.801에 달한다. 4월 홈런 11개는 2006년 카를로스 리(10개)를 넘어선 밀워키 구단 역대 최고 기록이다. 그러나 동시에 테임즈에게는 맞서 싸워야 할 새로운 편견이 생겼다. 지난해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시카고 컵스의 투수 코치와 선수가 금지 약물 복용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탓이다.
크리스 보시오 코치는 최근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테임즈는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한 페이스로 성적을 내고 있다. 그런데 누구도 그를 잘 모른다. 아무래도 그 정도 성적은 수수께끼다”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투수 존 래키 역시 “테임즈의 성적을 보면 많은 사람이 (의아해서) 머리를 긁적일 것”이라고 거들었다. 실제로 테임즈는 4월 18일과 26일, 29일에 무려 세 차례나 금지 약물 복용 검사를 받았다. 이 사실이 현지 기자들의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일부 메이저리거가 “테임즈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이렇게 자주 도핑 테스트를 받을 때가 있다”고 반박했지만, 충분히 표적 검사를 의심 받을 만한 빈도였다.
물론 이 같은 의혹을 반대로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다. ESPN은 “테임즈의 놀라운 출발이 모두에게 환영 받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아마 컵스가 (머리를 긁적이게 만든) 벼룩 검사를 받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또 “특정 시점에 가공할 성적을 냈던 다른 타자들이 분명히 있었다. 컵스 선수인 크리스 브라이언트도 지난해 8월에 그랬다”고 반박했다. 도리어 “컵스는 지난해 팀 동료인 제이크 아리에타가 부당하게 경기력 향상물질 복용 의혹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고도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게 놀랍다”고 썼다. 아리에타는 볼티모어에서 컵스로 이적한 2015년에 일약 22승을 따내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받았다. 지난해에도 18승을 올리면서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자 금지 약물을 복용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따라 붙었고, 이 의혹을 일축했다. 이 때문에 컵스 코치와 동료 투수가 더 손가락질을 받은 것이다.
# 테임즈 효과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일단 테임즈는 의연하다. 그는 “내겐 많은 양의 피와 소변이 있다”며 언제든지 도핑 테스트에 응할 수 있다는 자세를 취했다. ESPN 역시 “테임즈는 이전에는 아무 공에나 배트를 휘두르는 타자였다. 그러나 메이저리그보다 훨씬 많은 변화구를 던져 배트를 이끌어내는 KBO 리그를 경험한 뒤로는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공을 치지 않게 됐다”며 “타석에서 인내심이 크게 좋아져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금지 약물이 아닌, 한국 야구의 경험에서 승승장구의 비결을 찾은 것이다.
이런 평가는 수준급 선수들이 한국 야구의 문을 두드릴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 된다. 실제로 최근에는 한물간 30대 중후반의 선수들보다 테임즈처럼 유망주 출신의 20대 젊은 선수들이 KBO 리그를 찾는 사례가 늘어났다.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를 보장받지 못하느니, 마이너리그보다 대우가 좋고 경쟁력도 갖춘 KBO 리그를 경험하면서 다시 기회를 노리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테임즈뿐만 아니라 지난해 롯데에서 뛴 짐 아두치(디트로이트)도 올해 메이저리그에 다시 올라가 타격으로 존재감을 알렸고, 2015년 두산 외국인 투수였던 앤서니 스와잭(시카고 화이트삭스)도 불펜 투수로 빅리그에 복귀했다. 테임즈를 3년간 지켜본 김경문 NC 감독이 “테임즈가 한국에서 열심히 하면 다시 메이저리그로 가서 잘할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테임즈는 ‘한국판 세실 필더’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받고 있다. 토론토에서 그저 그런 선수였던 필더는 1989년 일본 프로야구로 건너와 38홈런을 때려냈다. 그리고 이듬해 메이저리그로 복귀해 디트로이트에서 홈런 51개를 날렸다. 메이저리그에서 13년 만에 나온 50홈런 기록이었다. 이듬해인 1991년에도 홈런 44개를 쳐 2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에 올랐다. 필더의 화려한 재등장 이후 메이저리그는 일본 프로야구를 향해 깊은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로 돌아간 테임즈의 맹활약 역시 ‘수출(KBO→메이저리그)’과 ‘수입(미국→KBO)’ 양방향에 모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캘러웨이 코치 이름이 낯익은 이유 ‘유니콘 타고 날던 때가 엊그제’ 클리블랜드는 지난해 10월 무척 의미 있는 순간을 맞이했다.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 5차전에서 토론토를 4승 1패로 꺾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1997년 이후 19년 만에 최고의 무대에 올라서는 기쁨을 누렸다. 클리블랜드의 한 지역지는 월드시리즈 진출이 확정되자 자체적으로 ‘MVP’를 선정했다. 그 이름은 에이스도, 4번 타자도 아닌 미키 캘러웨이 투수 코치(42)였다. ‘최고 수훈 선수(Most Valuable Player)’에게 주어지는 MVP라는 타이틀을 ‘선수’가 아닌 ‘투수 코치(Pitching Coach)’에게 붙였다. 클리블랜드의 승승장구에 캘러웨이 코치의 역할이 막중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정한 것이다. 캘러웨이의 이름은 한국 야구팬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지금은 사라진 현대 유니콘스를 추억하게 만드는 이름이다. 오른손 정통파 투수였던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평범한 선수 생활을 하다 2005년 현대와 계약하면서 한국에 왔다. 한국은 캘러웨이에게 ‘약속의 땅’이었다. 두 시즌 동안 합계 30승을 올렸다. 성적뿐만 아니라 야구 외적으로도 모범적인 외국인 선수의 표본이었다. 심지어 한국 음식에도 완벽하게 적응했다. 동태탕 국물에 밥을 비벼 맛있게 먹는 캘러웨이의 모습에 당시 현대 선수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KBS 현대 유니콘스 시절의 미키 캘러웨이. 연합뉴스 그러나 2007시즌 도중 부상으로 인해 한국을 떠났다. 통산 32승 22패, 평균자책점 3.56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캘러웨이가 떠난 그 해는 현대라는 이름의 구단이 존재했던 마지막 시즌이었다. 이후 캘러웨이는 2008년 대만에서 1년 더 선수 생활을 한 뒤 결국 선수 생활을 접었다. 그는 2009년부터 클리블랜드 싱글 A팀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동시에 자신의 진짜 재능을 찾았다. 뛰어난 코치라는 평가가 이어졌고, 시즌이 거듭될수록 입소문이 났다. 클리블랜드는 2013시즌을 앞두고 새 감독으로 부임한 테리 프랑코나에게 캘러웨이를 추천했다. 캘러웨이를 인터뷰한 프랑코나 감독은 자신이 잘 아는 코치를 제쳐두고 캘러웨이에게 투수 코치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선택은 탁월했다. 클리블랜드는 2000년대 중반부터 2012년까지 매년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캘러웨이가 투수 코치로 부임한 2013년부터 조금씩 팀 성적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투수 육성이 특히 빛을 봤다. 팀에 오자마자 부진에 빠져 있던 우발도 히메네스를 붙잡고 1 대 1 밀착 지도에 나섰다. 히메네스는 후반기 평균자책점 1.86을 기록하면서 13승을 올리고 확실한 부활을 신고했다. 메이저리그 언론이 무명의 투수코치 캘러웨이에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또 평범한 투수 코리 클루버는 캘러웨이의 권유로 싱킹 패스트볼(싱커)을 장착한 뒤 2014년 클리블랜드의 에이스이자 사이영상 수상자로 훌쩍 성장했다. 가능성은 최고였지만 발전이 더뎠던 트레버 바우어는 캘러웨이가 제안한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면서 해묵은 숙제였던 제구력 난조를 해결하고 팀 선발진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지난해 클리블랜드 마운드는 눈부셨다. 팀 평균자책점(3.79)과 선발 투수 평균자책점(4.08)이 리그 2위였다. 선발 투수 다섯 명이 모두 10승을 넘기는 안정감도 뽐냈다. 투수력을 앞세워 리그 정상까지 올라섰다. 챔피언십시리즈에서도 지난해 ‘홈런 군단’으로 명성을 떨친 토론토에게 5경기 합계 8점(경기 평균 1.6점)만 내주는 짠물 피칭을 펼쳤다. 현지에서도 캘러웨이 코치가 클리블랜드 마운드를 변화시켰다고 호평하는 이유다. 캘러웨이 코치는 메이저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과거 성적과 여러 국가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경험을 성공의 자양분으로 꼽는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경기를 했지만, 모든 게 나중에 지도자로서는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며 “웬만한 것은 다 겪어봤기에 선수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들을 이해하는 게 훨씬 쉽다”고 했다. 한국에서 보낸 2년여의 시간도 물론 캘러웨이 코치에게는 소중한 자산이다. 그는 “한국은 정말 멋진 나라였다. 우승을 향해 함께 뛴 동료들의 열정이 아직도 생각난다”며 “여전히 동태탕이 그립다. 내 딸은 김치찌개의 광팬”이라고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