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승전 최순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최순실은 박근혜 정부에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박근혜 정부에서 납득하기 힘들었던 일들에 최순실을 대입하면 풀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장면들도 적지 않다.
박근혜 정권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사건과 장면들이 적지 않다. 일요신문DB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기간부터 조짐이 보였다. 박 전 대통령 핵심 참모로 꼽혔던 최대석 이화여대 교수가 인수위 외교·국방·통일 분과 위원직에서 전격 사퇴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부터 박 전 대통령 남북 관계 자문 역할을 해왔던 최 교수는 당시 통일부 장관으로 유력하게 거론됐었다.
그런데 최 교수는 인수위원 활동 6일 만에 돌연 사퇴를 밝혔다. 인수위 측은 “일신상의 이유”라고 했지만 정치권에선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다는 추측에 무게가 실렸다. 대북 정책을 놓고 ‘비둘기파’에 속하는 최 교수가 ‘매파’ 라인들과 갈등을 빚다 퇴출된 것이란 말이 돌았던 것이다. 또 최 교수가 인사청문회를 부담스러워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이처럼 온갖 소문이 나돌았지만 최 교수는 지금까지 입을 닫고 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자 스캔들도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채 전 총장은 박근혜 정부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었던 국정원 댓글 사건 등을 수사하던 중 한 언론의 혼외자 보도로 낙마했다. 당시 채 전 총장은 친박 핵심부와 수사 등을 놓고 마찰을 빚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의 한 고위인사는 사석에서 “채 전 총장이 (정권이 정해 놓은) 수사 가이드 라인을 무시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밉보였던 것”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그 후 채 전 총장을 청와대가 찍어내려 했다는 여러 정황들이 포착되긴 했지만 아직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정치권에선 혼외자 논란과는 별개로 채 전 총장에 대한 석연치 않은 외압은 반드시 규명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검찰 내에서도 중도하차한 채 전 총장에 대한 동정여론이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채 전 총장은 ‘최순실 게이트’를 조사하기 위한 특검 후보로도 거론된 바 있다.
정부 고위 인사들의 항명 사태도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친박 실세’로 불리던 진영 보건복지부 전 장관 사태가 대표적이다. 진 전 장관은 박 전 대통령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지냈다. 2012년 대선 때는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 부위원장을 맡아 박 전 대통령 대선 공약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인수위에서도 부위원장으로서 정권 인수인계 전반을 총괄했다.
진 전 장관 퇴임을 둘러싸고도 갖가지 추측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기초 연금 축소 등 복지 공약을 놓고 청와대 참모들과 갈등을 빚었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진 전 장관도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하는 방안에 반대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도 항명 논란에 휩싸였다. 김 전 수석은 2015년 정윤회 문건 파동 당시 국회 운영위 출석을 끝까지 거부했다. 상관인 김기춘 청와대 전 비서실장이 출석 지시를 내렸으나 김 전 수석은 따르지 않았다. 이에 김 실장은 “비서실장이 지시한데 대해 공직자가 응하지 않는다면 강력한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불쾌한 심경을 내비쳤다. 결국 김 전 수석은 사의를 표명했다.
‘세월호 7시간’ 또한 여전히 의문 부호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 당일 박 전 대통령은 오후 5시 10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하기 전까지 국가안보실과 정무수석실로부터 총 15차례 보고를 받았다. 이 가운데 6건은 전화 보고, 나머지 9건은 팩스 등 서면으로 이뤄졌다고 알려졌다. 사고가 난지 7시간가량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박 전 대통령 행적은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다.
박 전 대통령 7시간 행적은 국회에서 열린 이른바 ‘최순실 청문회’와 특검 수사에도 포함됐지만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여기엔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의 비협조적 태도, 일부 증인들의 위증이 가장 큰 이유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세월호 사고 당일 박 전 대통령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문서들이 대부분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분류돼 진실 규명은 더욱 힘들어졌다. 세월호 7시간을 밝힐 단서가 될 수 있는 자료가 15년~30년간 봉인된 셈이다.
2015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성완종 리스트’도 미완으로 남았다. 자원 외교 비리 등으로 검찰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 자신이 돈을 건넨 로비 명단을 남겼다. ‘성완종 리스트’다. 리스트엔 박근혜 정부의 내로라하는 실세들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검찰은 리스트에 이름이 있던 인사들 중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와 이완구 전 국무총리만을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관련 수사를 마무리했다. 이 외에 허태열 전 대통령비서실장 이병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서병수 부산시장 유정복 인천시장 등 친박 핵심 인사들에 대해선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공소시효가 넘어 ‘공소권 없음’을 처분 받았다. 이를 놓고 정치권은 부실 수사 의혹을 제기했다.
이처럼 박근혜 정부에선 유독 석연치 않은 일들이 많았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청와대 외부에선 정보가 왜곡돼서 들어가고, 내부에선 일정한 조율을 거치지 않은 일방적 지시가 마치 최고인 것처럼 하달되는 구조였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대통령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어떤 이유에서 어떤 과정으로 결과를 냈는지 합리적으로 추론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로서 가장 큰 피해는 국민이 봤고 그 책임은 대통령이 지고 있다”고 평했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