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8일 KBS ‘뮤직뱅크’ 에서 높은 방송점수, 음반 점수로 아이유를 꺾고 1위에 오른 라붐이 ‘사재기 논란’에 휩싸였다.
신곡을 내고 라이벌 그룹과 1위 다툼을 벌여야 하는 가수라면 누구나 한 번씩 사재기 논란에 휩싸인다. 여기서 사재기는 보통 ‘음반 사재기’를 가리키는데, 개인이나 단체가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음반 판매량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행위를 말한다. 개인 팬이나 팬덤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1위로 만들어주고 싶어서 수천~수만 장의 앨범을 구입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사재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적인 측면에서는 음반·음악영상물 관련업자 등을 사재기 행위의 주체로 보고 있기 때문에 팬들의 행위는 위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실제로 지난해 8월 1일 발매한 오마이걸의 <내 얘길 들어봐> 앨범의 경우는 하루 판매량만 9030장이 집계되면서 사재기 논란이 불거졌는데, 이 가운데 8600장을 개인 팬 한 명이 한꺼번에 구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사그라졌다.
이제까지 문제가 되는 것은 사재기 행위에 소속사가 관여했는지 여부였다. 이미 기존에도 가요계에서는 2010년 이후부터 소속사가 관여한 크고 작은 사재기 논란이 지속적으로 불거져 왔다. 특히 여성 아이돌 그룹의 사재기 논란이 가장 크게 불거졌던 2011년 하반기에는 아예 음악프로그램이 음반판매 점수 비중을 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라붐의 경우는 기존 사재기 논란과는 조금 다르다. 지난 <뮤직뱅크>에서 라붐은 디지털 음원점수 116점, 시청자 선호도 점수 0점, 방송점수 2086점, 음반점수 2344점으로 총점 4546점을 기록했다. 아이유는 디지털 음원점수 3816점, 시청자 선호도 점수 304점, 방송점수 44점, 음반점수 0점으로 총점 4156점이었다. 아이유의 음반점수가 0점인 것은 집계 당시 아이유의 음반이 발매 전이었기 때문이다.
정식 음반 발매 전이었던 만큼 방송점수 역시 라붐이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했기 때문에 수치만 보고 판단한다면 사실상 라붐의 1위 쟁취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이 뜨거운 감자로 취급되고 있는 것은 라붐의 음반 판매량에 대한 의혹 때문이다.
‘사재기 논란’에 휘말린 라붐. 사진출처=라붐 인스타그램
라붐의 미니앨범 2집 ‘MISS THE KISS’의 초동 판매량은 2만 8000장 이상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지난달 기준으로 2017년에 나온 걸그룹 앨범들 가운데 초동 판매량 3위의 수준이다. 라붐이 이번 앨범의 초동 판매량으로만 제친 아이돌은 오마이걸, 트와이스, 마마무 등 경쟁상대 이상의 쟁쟁한 그룹들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라붐의 지난해 발매됐던 앨범 초동 판매량은 대략 800~900장가량으로 전해졌는데, 그렇다면 이번 앨범은 그에 비해 약 35배나 폭증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에 라붐 측은 지난 2일 보도자료를 통해 공식 입장을 밝혔다. 라붐의 소속사인 글로벌에이치미디어는 “라붐을 국내 및 국외 모델로 기용한 S프랜차이즈 사 측에서 프로모션을 진행하기 위해 라붐의 앨범을 대량 구매한 것”이라며 사재기 논란과는 일절 관계가 없음을 주장했다. 기존의 사재기 논란과 다른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전에 논란의 중심이 돼 왔던 가수들의 경우는 소속사나 팬덤이 사재기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았지만, 라붐은 광고주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글로벌에이치미디어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광고주가) 프로모션 용으로 앨범을 필요로 한 것이기 때문에 소속사 측에서 비매품으로 이를 빼줄 수는 없었고 광고주가 직접 구매하게 된 것“이라며 ”새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방송사에 돌리는 것처럼 소속사 홍보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데 비매품으로 빼줘야 할 이유가 없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제3자가) 정당하게 구입한 것이 방송 프로그램 1위 집계에 포함된 것이므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광고주 측이 당초 계약에 이 같은 조항을 명시하고 조건을 건 것이 아니라 계약 체결 후 뒤늦게 구두 요청한 것이며, 소속사로서는 거절할 이유도 없고 손해를 볼 사안도 아니기 때문에 요청대로 따라줬다는 것이 소속사의 입장이다.
일견 일리 있어 보이는 주장이지만 뒤바꿔 생각하면 라붐의 논란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선례로 남을 경우, 이후의 음반 판매량 집계 판도의 신뢰도가 크게 흔들릴 우려가 남는다. 실례로 만일 지난 4월 28일 라붐과 맞붙었던 아이유 측도 ‘광고주 찬스’를 썼다면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음반 판매량이 집계됐을 수도 있다.
실제 인기나 인지도와는 별개로 프로모션을 위한 광고주의 음반 대량 매입이 정식 판매량으로 집계되는 것은 가요계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광고주가 직접적인 음반·음악영상물 관련 업자로는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해당 소속사와 광고 계약을 체결한 만큼 ‘관계자’로는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중소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음원 선호도나 방송 출연도 중요하지만 아직까지는 음반 판매량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데 팬덤 2~3개는 가볍게 누를 수 있는 ‘큰손’인 광고주까지 음반 시장에 끼어들게 된다면 누가 이런 집계를 공신력이 있다고 판단하겠나”라며 “이 같은 사례가 문제가 없다는 선례로 남는다면 이후 순위 싸움은 누가 더 막강한 자금력을 휘두를 수 있는 광고주와 계약을 체결하느냐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