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 투수는 ‘투수 놀음’이라 불리는 야구에서도 꽃 중의 꽃이다. ‘에이스’라는 이름의 왕관도 선발 투수들만 쓸 수 있다. 대부분의 투수들이 선발을 꿈꾸며 야구공을 쥔다. 불펜에서 활약하면서 이름을 널리 날린 투수들도 열 가운데 아홉은 “선발 투수로 뛰어 보고 싶다”는 바람을 털어 놓는다. 매년 각 구단 스프링캠프에서 선발진에 남은 한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불꽃 경쟁이 펼쳐지는 이유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그만큼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다. 현역 시절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A 투수코치는 “선발 투수가 공을 던져야 게임이 시작된다는 점 때문에 꼭 선발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확실히 내가 경기의 주인공이라는 기분이 있다”며 “상대 타자와 등 뒤의 야수들이 선발 투수의 공 하나하나에 맞춰 반응한다. 내 피칭에 따라 경기 전체가 좌우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그 느낌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 선발투수는 꽃 중의 꽃이다
탄탄한 선발진은 팀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지난해 최강의 선발진은 단연 통합 우승팀 두산이었다. 15승 투수 네 명을 한데 묶은 ‘판타스틱 4’가 위용을 떨쳤다. 올해는 이들이 아직 정상 가동되지 못했다. 18승 투수 마이클 보우덴이 계속 어깨 통증을 호소해 전열을 이탈했다. 그러자 두산의 성적도 뒤로 처졌다. 대신 다른 구단 선발진이 무섭게 약진했다. ‘판타스틱 4’와 비슷한 별명도 하나씩 꿰찼다.
KIA 타이거즈 양현종. 연합뉴스
KIA는 환상적인 4각 편대를 구축했다. 외국인 듀오인 헥터 노에시와 팻 딘, 기존 왼손 에이스 양현종이 맹활약하는 것은 물론 4선발 임기영까지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KIA의 연고지인 전라도 사투리를 응용해 ‘좋아부러 4’ 혹은 ‘겁나부러 4’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명실상부 현 시점 최고의 선발진이다. KIA의 승승장구가 이들의 활약과 직결된다는 점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넥센은 국내 선발진이 막강하다. 지난해 15승으로 신인왕에 올랐던 신재영이 선봉장이고, 국가대표급 투수인 한현희와 조상우가 1년에 걸친 재활을 마치고 복귀하면서 나란히 선발진에 합류했다. 게다가 5선발 최원태까지 놀라운 성장세로 선발 마운드의 한 축을 이뤘다. 외국인 투수 없이도 막강한 국내 선발진이라는 의미로 ‘신토불이 4’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부동의 에이스 앤디 밴 헤켄의 위력까지 더하면 선발 5인 로테이션에 빈틈이 없다.
LG 역시 데이비드 허프-헨리 소사-류제국-차우찬으로 이어지는 ‘어메이징 4’를 보유하고 있다. 허프가 부상으로 시즌 첫 달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다른 투수들이 훌륭하게 공백을 메워 팀을 상위권으로 이끌었다. 허프의 합류와 동시에 더 막강해질 일만 남았다.
다른 팀들도 선발들의 활약에 활짝 웃고 있다. 롯데는 기존 외국인 투수 브룩스 레일리가 안정적이고, 새 외국인 투수 닉 에디튼도 합격점을 받았다. ‘영건’ 박세웅이 차세대 에이스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고, 베테랑 송승준도 지난해의 부진을 털고 노련한 기량을 뽐내는 중이다. NC에는 제프 맨쉽이라는 복덩이가 굴러 들어왔다. 한국에서의 첫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연승 행진을 펼쳤다. 4월에는 등판한 6경기에서 모두 승리 투수가 됐을 정도다.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늘 조기 교체로 논란을 빚었던 한화조차 올해는 선발 투수들이 훨씬 더 긴 이닝을 버텨주고 있다. 지난해 이맘때와 비교했을 때 전 구단 선발 마운드에 눈에 띄게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 선발투수의 의무는 무엇인가
KBO 야구 규칙은 선발 투수를 ‘구단이 주심에게 제출한 타순표에 기재돼 있는 투수’로 규정하고 있다. ‘상대팀의 첫 타자 혹은 그 대타자가 아웃되거나 1루에 나갈 때까지 투구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부상으로 투구가 불가능할 때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한 타자 이상 상대를 해야 물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선발 투수의 기본 의무는 ‘5이닝’이다. 4⅔이닝을 퍼펙트로 막아도 5회를 채우지 못하면 승리 투수가 될 수 없다. 운이 좋으면 딱 한 타자만 아웃시키고도 1승을 챙길 수 있는 불펜 투수와 분명히 다르다. 야구 규칙은 ‘선발 투수는 최소한 5회를 완투한 후에 물러나야 한다. 교체 당시 자기 팀이 리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리드가 경기 종료까지 유지됐을 경우에 선발 투수를 승리 투수로 기록한다’고 명시했다. 또 ‘선발 투수에게 최소 5회의 투구가 필요하다는 규정은 6회 이상의 경기에 전부 해당한다. 경기가 5회에 종료됐을 경우에는 선발 투수가 최소한 4회를 완투한 후 물러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NC 다이노스 제프 맨쉽. 연합뉴스
그만큼 갖춰야 할 덕목이 많다. 투수 출신인 B 해설위원은 “불펜에서 선발로 전환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며 “불펜 투수들은 짧은 이닝 동안 빠르게 공을 던지고 내려오는 투구 스타일이 몸에 배 있다. 그래서 처음 선발로 전환하면 구속 조절에 애를 먹는다”고 했다. 불펜에서 던질 때처럼 투구하면 선발로 오래 버틸 수 없다. 이 해설위원은 “보직을 바꿀 때 2군에서 한두 경기 선발로 던진 뒤 1군에 올라오게 하는 이유가 단순히 투구 수를 늘려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며 “투구 패턴이나 투구 스타일을 바꿔야 자연스럽게 완급을 조절하면서 더 많은 공을 던질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투수 출신 C 해설위원 역시 “선발 투수는 느린공을 던져도 자신감이 있지만, 중간 투수들은 세게 던지던 버릇이 있어서 느린공을 던질 때 두려움이 생긴다”며 “그래서 좌우 스페셜리스트들보다 롱 릴리버들이 대체적으로 선발 변신을 많이 한다. 스페셜리스트들은 멀티 이닝을 던지는 일이 거의 없지만, 롱 릴리버들은 자신이 가진 구종들을 다양하게 조절하며 쓸 줄 안다”고 덧붙였다.
# 선발투수와 불펜투수의 차이
야구 전문가들은 “최고의 마무리 투수인 오승환(세인트루이스)이 지금 선발 투수로 전환한다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도 한다. 그만큼 선발 투수와 불펜 투수에 적합한 유형의 투수가 각각 따로 있다는 의미다. 그 역할을 잘 파악해 길을 정해주는 것도 프로 지도자들의 할 일이다. 경기를 스스로 풀어 가면서 잡아내야 하는 경기 초반의 아웃카운트 15개와 온 힘을 쏟아 부어 지켜야 하는 경기 마지막 아웃카운트 3개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선발 투수들이 마무리 투수처럼 매 타자를 상대로 전력투구 했다가는 3회도 못 버티고 금세 마운드를 내려와야 한다.
앞서 언급한 A 코치는 “선발 투수들은 1회와 2회, 3회와 4회, 5회와 6회에 던지는 방법이 다 다르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언제 등판할지 알고 있고 상대를 분석할 시간이 그만큼 주어지기 때문에 그 장점을 잘 활용해야 한다”며 “불펜 투수는 빠른 직구와 이를 뒷받침할 좋은 변화구 하나만 있으면 되지만, 선발 투수는 다양한 구종을 던질 줄 알거나, 같은 구종이라도 속도 조절을 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올해 처음으로 선발진에 합류한 D 투수 역시 “중간 투수는 한 경기에서 타자 한 명을 한 번씩만 상대하면 되지만, 선발 투수는 한 타자를 적게는 두 번, 많게는 세 번 이상 상대해야 한다는 게 가장 어려웠다”며 “타순이 한 바퀴 돌면 또 다른 생각을 하며 싸워야 한다. 매번 전력투구로 맞서고 싶은 유혹을 떨치는 게 어려웠다”고 귀띔했다.
불펜에서 선발로 전환하면서 직구 구속이 느려지는 투수들도 나온다. A 코치는 “공 10개, 20개에 온 힘을 쏟는 게 아니라 투구 수 관리를 위해 공 100개에 힘을 나눠서 쓰다 보면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과거 한화 시절 류현진(LA 다저스)이 경기 초반보다 후반에 오히려 더 구속이 올라가기도 했던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고 했다. 초반에는 체력 안배를 위해 힘을 조절하느라 직구 구속을 시속 140㎞대 중반으로 유지했지만. 7회가 넘어서도 여력이 있을 때는 남은 투구에 힘을 집중하면서 시속 140㎞대 후반까지 나올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선발 투수에게는 그 어떤 선수보다 강한 책임감이 요구된다. 마무리 투수가 위기 상황에서 느껴야 하는 극한의 압박감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C 해설위원은 “선발 투수는 5일에 한 번 경기에 나가는 포지션이니 자신이 나가는 경기에서는 다른 동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있다. 선발 투수가 무너지면 경기가 어떻게 되는지 잘 보고 느껴야 한다”며 “등판하지 않는 날에도 팀의 일원으로서 든든함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 늘 일관성 있는 모습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주1일 근무? 뭘 모르는 소리!’ 경기보다 고된 선발 투수의 루틴 선발 투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는 ‘루틴’이다. 루틴은 선발 등판 직후부터 다시 마운드에 오르기 직전까지, 정해진 순서에 따라 몸을 관리하고 다음 등판을 준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처음 선발 투수 전환을 준비하는 불펜 투수들은 경기에 출전하지 않는 4~5일간의 루틴을 정할 때 가장 애를 먹는다. 투수들 각자에게 맞는 방법이 따로 있는데, 그 노하우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팀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트레이닝 코치의 도움을 받는다. 점점 선발 등판 횟수가 늘어나면서 스스로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간다. 베테랑 선발 투수들은 등판과 등판 사이의 4~5일을 ‘휴식일’이라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 모든 게 또 다른 싸움이다. 쉴 때도 이유가 있어서 쉰다. 2010년 이후 KBO리그에서 가장 견고한 선발 투수였던 삼성 윤성환은 “누가 더 하루하루를 빼먹지 않고 재미없게 보내느냐에 따라 좋은 선수냐 아니냐가 판가름 난다”고 했다. 패턴은 대부분 비슷하다. 그 안에서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조금씩 변화를 준다. 예를 들어 왼손 A 투수는 피칭 후 마운드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튜빙이나 덤벨을 사용한 보강 운동을 한다. 오른손 B 투수는 아이싱을 한 뒤 피로물질인 젖산이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 유산소 운동을 한다. 그는 “아이싱을 10분 정도 하면 운동을 그 두 배로 한다”며 “그날 밤에는 단백질이 풍부한 고기를 많이 먹어서 손상된 근조직을 복구시킨다”고 했다. 등판 다음 날엔 장거리 러닝이 필수다. A와 B 모두 20분간 자유롭게 장거리를 뛰면서 몸에 쌓인 젖산(피로물질)을 빼낸다. 효과적으로 젖산을 제거해야 부상을 방지할 수 있다. A는 러닝 후 상체 운동을 하고 30m 소프트 토스로 어깨를 푼다. 공을 던질 때 쓰는 어깨 아래 견갑골 주변을 강화하는 운동을 또 한다. B는 상체와 하체 근육 운동을 가볍게 해 몸의 균형을 맞춘다. 식사는 역시 단백질 위주로 한다. 그 다음 날도 중거리 러닝이다. 외야 좌우 폴 사이를 조금 빠른 속도로 반복해서 달린다. 러닝은 하체 밸런스와 근력 유지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A는 이날 공을 전혀 잡지 않지만, B는 소프트 토스를 가볍게 한다. 셋째 날은 좌우 파울 폴 거리를 절반으로 나눠 뛰는 하프 런을 8~10회 반복한다. 척추를 강화하는 코어 운동으로 몸의 중심도 잡아준다. A는 이날 롱토스를 시작하고, B는 불펜 피칭을 30개 전후로 한다. 대부분의 투수들이 등판 이틀 전에 불펜에서 공을 던지지만, B는 “나는 사흘 전에 던지는 게 편하다. 불펜 피칭을 통해 포인트를 잡는다”고 했다. 넷째 날은 단거리 전력 질주. 다양한 단계의 러닝이 이어진다. A와 B는 30m와 50m, 70m짜리 전력질주를 5세트씩 한다. A는 다른 투수들과 마찬가지로 이날 30개 전후의 불펜 피칭을 소화한다. 이후 보강 운동도 빼먹지 않는다. 반면 하루 전 불펜 피칭을 마친 B는 공을 잡지 않는다. 등판 하루 전인 다섯 번째 날에는 모두가 강도 높은 훈련을 하지 않는다. 러닝은 선수들의 선택에 맡기고, 컨디션 조율에 힘쓴다. A는 소프트 토스, B는 캐치볼로 루틴을 마무리한다. 저녁에는 무조건 휴식. 홈경기가 길어지면 다른 선수들보다 먼저 ‘퇴근’을 허락받기도 한다. 다음날이 지방 원정 경기라면, 선발 투수들은 훈련을 마친 뒤 동료들보다 하루 먼저 원정지로 이동한다. 야간 이동이 다음 날 등판에 무리를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렇게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선발 투수들은 로테이션에 따라 마운드에 오른다. 경기에만 나서지 않을 뿐, 결코 적지 않은 훈련량이다. 한 투수는 “차라리 경기에 나가는 게 편하다. 등판하지 않는 날이 너무 지루하다”고 했고, 또 다른 투수는 “잘 던진 다음에는 다음에 또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기고, 못 던진 다음에는 빨리 다음 경기에서 만회하고 싶다는 조급함이 생긴다”며 “등판 사이의 5일이 결코 편하지 않다”고 털어 놓았다. “하루 던지고 5일을 쉬니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선발 투수를 꿈꾸는 선수들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