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환은 KBO 리그가 낳은 역대 최고 마무리 투수다. 실제로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과 한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물론 일본과 메이저리그도 ‘클로저’ 오승환의 능력을 인정했다. 거액의 몸값과 톱클래스 대우를 선사하며 러브콜을 보냈다. 오승환의 위상이 바로 마무리 투수의 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무리 투수는 선발 투수처럼 승리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대 야구에서 승리를 지키는 것이 만드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은 거의 매 경기 입증되고 있다. 마무리 투수가 불안한 팀은 결코 최강이 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감독들이 붙박이 마무리 투수를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팀의 한 시즌에 점점 더 무거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홈페이지 캡처
# 마무리 투수의 역사
마무리 투수라는 보직은 초창기 프로야구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불펜 투수는 선발 투수가 되지 못한 선수들이 밀려나 어쩔 수 없이 맡게 되는 자리로 여겨졌고, 따로 역할 구분 없이 상황에 따라 필요한 투수들이 나가 경기를 책임지는 형태였다. 선발 투수가 잘 던지면 투구 수에 관계없이 무조건 경기 끝까지 책임지게 하는 일도 허다했다. 이런 분위기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야구 역사 전문가인 빌 제임스는 당시 워싱턴 소속으로 뛰었던 퍼포 마머리라는 투수가 최초로 현대 마무리 투수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꼽는다. 마머리는 선발승이 세이브보다 많았던 투수다. 마머리가 마무리 투수의 개념을 정립했다면, 1930년대 뉴욕 양키스 투수 조니 머피는 전문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최초의 선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머피가 고정적으로 경기 마지막에 등판하기 시작하면서 성공 사례를 남기자 1940년대부터 메이저리그 각 팀에 마무리 투수라는 보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마침내 ‘세이브’라는 기록이 탄생했고, 1969년부터는 메이저리그가 세이브를 공식 기록으로 집계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마무리 투수가 중요한 투수 보직의 하나로 공인된 것이다.
물론 당시의 마무리 투수들은 1이닝이 아닌 2~3이닝을 던지는 일이 잦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그런 분위기가 이어졌다. 심지어 한국 프로야구는 1990년대 후반에야 투수 분업화가 제대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82년 구원 1위에 오른 황규봉부터 2002년 구원왕인 조용준까지 스물한 명의 투수 가운데 1997년 이상훈(85⅓이닝)과 2000년 진필중(73이닝)을 제외한 열아홉 명이 그해 100이닝을 넘게 던졌다. 특히 황규봉은 무려 222⅓이닝을 소화했고, 1985년 권영호가 174⅔이닝, 1986년 김용수가 178이닝, 1992년 송진우가 191⅓이닝을 각각 기록했을 정도다. 선동열이나 구대성 같은 명투수들조차 1990년대 중반까지 마무리 투수로서 투구 이닝을 관리 받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선동열은 5~6회에 등판해 9회까지 던지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구대성 역시 구원 1위에 올랐던 1996년에 139이닝을 던져 18승 24세이브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KBO 리그는 2003년까지 세이브가 아닌 ‘세이브포인트(세이브+구원승)’를 기준으로 구원왕을 시상했다. 마무리 투수들이 세이브 상황과 관계없이 마운드에 오르는 일이 워낙 많으니, 세이브와 구원승을 모두 포함하는 게 구원 투수들의 가치 판단에 적합하다고 여겨서다. 그러나 점점 마무리 투수들의 역할이 세분화되면서 ‘구원승’은 소방수의 역할을 평가하는 데 큰 의미가 없어졌다. 오히려 동점을 허용한 뒤 팀이 역전승했을 때 1승이 따라 붙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 때문에 2004년부터는 오직 세이브만으로 구원왕을 선정하기 시작했다. 구원왕 선정 제도 개편 이후 첫 수상자는 2004년 36세이브를 올린 임창용이었다.
임창용. 연합뉴스
# 세이브 요건
기록이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세이브가 마무리 투수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긴 경기 마지막에 등판한다고 해서 모두 세이브를 따내는 것은 아니다. 세이브 요건은 꽤 까다롭다. 무엇보다 팀이 적당한 점수 차로 이겨야 세이브를 쌓을 수 있다. 너무 크게 이겨도 불리하다. 과거 마무리 투수를 경험한 한 투수는 “며칠간 개점휴업을 하다 모처럼 팀이 3점차로 앞서고 있어서 내심 ‘타자들이 점수를 그만 냈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KBO 야구 규칙은 구원 투수의 세이브 요건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소속 팀이 승리를 얻은 경기를 마무리한 투수이자 승리 투수가 되지 못한 투수여야 한다. 팀 승리를 지키는 것은 세이브의 기본. 대신 승리와 세이브는 동시에 얻지 못한다는 의미다. 선발 투수가 1회부터 9회까지 완투해 팀이 승리한다면, 그 투수가 경기를 마무리했다 해도 세이브가 아닌 승리가 주어진다.
이 전제 하에 다음 세 가지 요건 가운데 하나를 충족해야 한다. ▲소속 팀이 3점 이하 리드를 하고 있을 때 출전해 최소한 1이닝을 투구하였을 경우 ▲베이스에 나가 있는 주자 또는 상대하는 타자 또는 그 다음 타자가 득점하면 동점이 되는 상황에서 출전하였을 경우 ▲최소 3회를 효과적으로 투구했을 경우다.
기본적으로 3점 차 이내 리드 상황에서 2실점 이하로 막아내면 세이브가 성립된다. 이 경우에는 무조건 아웃카운트 3개 이상을 잡아야 한다.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9회 1사 후나 2사 후 등판한다면, 세이브를 얻을 수 없다. 두 번째 조건 같은 경우엔 마무리 투수가 등판하는 상황에서 베이스를 지키고 있는 주자의 숫자에 따라 세이브 요건에 해당하는 점수 차가 달라진다. 마무리 투수가 연속 타자 홈런을 허용했을 때 동점이 되는 상황을 세이브 요건이라 여기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예를 들어 팀이 6-1로 앞선 9회 무사 만루서 만루홈런을 맞고 6-5 리드를 지켰다면 세이브가 성립된다. 점수는 5점 차지만 이미 베이스에 주자가 모두 차 있는 위험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 경우 다음 타자까지 홈런을 쳐야 동점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 세이브 요건을 충족한다. 세 번째는 말 그대로 경기 가장 마지막에 3이닝을 던진 투수에게 점수 차와 상관없이 세이브를 주는 것이다. 10-0으로 이겨도 마지막 3이닝을 던지면 세이브를 얻을 수 있다. 투수 분업화가 이뤄진 현대 야구에서는 가장 드물게 보이는 세이브다.
세 가지 요건은 홀드 기록에도 모두 해당되는 동일 조건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세이브는 경기를 끝낸 단 한 명의 투수에게만 주어지지만, 홀드는 같은 상황에서 등판해 역전을 허용하지 않은 모든 불펜 투수에게 고루 주어진다. 네 명이 성공하면 네 명 모두 1홀드씩 가져간다. 또 해당 투수가 내려간 뒤 팀이 역전을 당하거나 패배를 해도 자신이 리드를 지켜내기만 하면 홀드 기록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무리 투수에게는 ‘다음’이 없다. 내가 못 지키면 끝이다. 그래서 불펜 투수들 가운데 가장 압박감이 크고 외롭다.
# 달라진 위상
요즘 마무리 투수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대접’을 많이 받는다. 일단 8회에 팀이 갑작스럽게 큰 실점 위기를 맞지 않는 이상, 9회 1이닝만 소화하는 게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팀이 연패에 빠지거나 하위권으로 처진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동점 상황에서 등판하는 일도 거의 없다. 마무리 투수라는 역할에 대한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이런 조짐이 감지된 지 오래다. 1992년 데니스 에커슬리가 구원 투수 최초로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했고, 2003년엔 에릭 가니에가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선발 투수가 최고 투수’라는 인식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최근에는 가치가 더 치솟았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는 현역 시절 무려 1500만 달러(약 168억 원)라는 연봉을 받았다. 이전까지 역대 마무리 투수 최고액. 그런데 지난해 말 무려 세 명의 마무리 투수가 그 금액을 넘어섰다. 샌프란시스코가 마무리 투수 마크 멀랜슨과 4년 6200만 달러(1년 평균 1550만 달러)에 계약했고, 이틀 뒤 뉴욕 양키스가 월드시리즈 우승팀 시카고 컵스의 마무리 투수였던 강속구 투수 아롤디스 채프먼과 5년 8600만 달러(1년 평균 1720만 달러)에 사인했다. 이뿐만 아니다. LA 다저스 마무리 투수 캘린 잰슨은 며칠 뒤 5년 8000만 달러(연 평균 1600만 달러)를 받고 팀에 남았다. 심지어 잰슨은 워싱턴이 제시한 8500만 달러 계약을 뿌리치고 다저스에 남았다는 후문이다. 메이저리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점점 ‘이닝 이터’ 선발 투수들이 사라지면서 불펜 투수들의 비중이 높아졌고, 불펜의 꽃인 마무리 투수의 존재감 역시 더 커졌다. 최근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팀들이 대부분 강한 불펜의 위력을 앞세웠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도 물론 위상의 변화가 생겼다. 전문 마무리 투수인 롯데 손승락은 넥센에서 뛰던 2013년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1994년 40세이브를 올린 정명원 이후 19년 만에 나온 마무리 투수 출신 수상자였다. SK 마무리 투수였던 정우람은 2016 시즌을 앞두고 FA가 돼 한화로 이적하면서 4년 총액 84억 원을 받았다. 역대 불펜 투수 FA 최고이자 투수 FA 전체 몸값에서도 5위 안에 드는 금액. 과거 불펜 투수들은 꿈도 꾸지 못했을 초특급 대우다.
무조건 ‘선발이 최고다’라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빠른 공을 던지고 배짱이 좋은 유망주라면 굳이 선발로 돌리지 않고 마무리 투수 감으로 육성하기도 한다. 오승환이 바로 입단 첫 해부터 불펜을 거쳐 곧바로 마무리 투수로 낙점된 케이스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콩팥 없는 클로저’ 트레버 호프먼, 편견과 싸우며 601 세이브 삼성 시절 오승환(세인트루이스)이 9회 마운드에 오를 채비를 하면, 대구구장에 익숙한 음악이 흘러 나왔다. 수업이 다 끝나고 종례를 마칠 때 온 학교에 울려 퍼지던 바로 그 종소리였다. 이제 오승환이 나오고 경기가 곧 끝날 테니 집에 갈 채비를 하라는 메시지. 홈 관중에게는 전율을 안기고, 상대팀 선수들의 기운을 빼앗아가는 등장 음악이었다. 트레버 호프먼. 연합뉴스 그만큼 대단한 마무리 투수였다. 호프먼이 남긴 각종 기록을 1년 뒤 리베라가 갈아치웠지만, 호프먼은 그 이전에 가장 큰 위엄을 지닌 마무리 투수였다. 1989년 신시내티에 입단했고 1993년 플로리다로 팀을 옮겼지만, 그해 다시 쫓기듯 이적한 샌디에이고에서 그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그는 몸에 신장(콩팥)이 없는 투수로도 유명하다. 태어난 지 6주 만에 신장 기능이 멈춰 어릴 때 신장을 아예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 신체적 핸디캡 탓에 대학 때까지 수준급 내야수로 활약하면서도 메이저리그 신인드래프트 11라운드에서야 간신히 구단에 지명 받았다. 그리고 결국 같은 이유로 원래 자리인 유격수를 포기하고 투수로 전향했다.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 투수 전향 초기에는 어깨가 싱싱해 90마일대 후반 강속구를 뿌려댔고, 1994년 어깨 부상으로 고생하던 시기에는 체인지업을 연마해 야구 인생 최고의 주무기를 장착했다. 점점 메이저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팀이 이기든 지든 모든 경기에서 5회가 지나면 무조건 몸을 푸는 성실함으로도 유명해졌다. 1998년에는 마무리 투수라는 보직 탓에 아쉬움도 맛봤다. 1점대 평균자책점으로 무려 53세이브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지만,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투표에서 톰 글래빈에 밀렸다. 1위표는 글래빈보다 많았지만, “마무리 투수에게 사이영상을 줄 수 없다”는 뜻을 가진 기자들이 2위와 3위에도 호프먼의 이름을 적지 않은 게 문제였다. 결국 2위표를 많이 받은 글래빈이 사이영상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 후로도 호프먼은 실력으로 마무리 투수를 향한 편견과 싸웠다. 메이저리그 최초로 500세이브를 돌파했고, 밀워키 소속이던 2010년 9월 29일 뉴욕 메츠전에서 통산 601번째 세이브를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이듬해 은퇴를 선언했다. 600세이브는 20년 동안 매년 30세이브씩 해야 올릴 수 있는 대기록이다. 호프먼이 전성기를 보낸 샌디에이고는 2011년 6월 그의 등번호 5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내셔널리그는 최고의 구원 투수에게 주는 상 이름을 ‘트레버 호프먼 상’으로 지정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