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한국적 정치문화의 영향으로 정치 체제는 양당제로 흘러왔다.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는 ‘독재 정당’과 ‘민주 정당’이라는 이분법적 구조가, 군부 통치가 무너진 1987년 대선 이후에는 잠시 지역분할 구도하의 다당제가 나타나기는 했으나 이내 3당 합당을 통한 양당제 구도로 복귀했다.
1990년대 중반 김종필이 이끄는 자유민주연합이라는 정당이 나오면서 다시 다당제로 가는 듯했으나 이른바 DJP연대(김대중과 김종필의 연합)는 이 구도를 다시 허물고 양당제로 복귀시켰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중앙홀에서 열린 제19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을 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이런 역사를 뒤로하고 2017년 대한민국 정치는 새로운 역사를 실험하고 있다. 다자 구도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대선 이후에도 과연 다당제 구도가 정착할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다당제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동반한 ‘협치’가 필수적인 만큼 대한민국 정치가 새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도래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치문화의 관성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지적도 있다. 폐쇄성 강한 정치문화는 결국 대대적 정계 개편을 통해 양당제라는 ‘기존 경로’를 향해 폐쇄적 회귀에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 더불어민주당 몸집 불리기 나설까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민주당으로선 여소야대 정국을 헤쳐 나가야 한다. 겉만 집권 여당이지, 의석이 과반에 못 미친다. 자력으로는 법안 처리가 불가능하다. 기존 체제로는 정국 돌파가 쉽지 않은 셈이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민주당은 어떤 식으로든 정계개편을 통해 몸집 불리기에 나설 것이 확실시된다.
민주당의 제1 타깃은 한때 한 지붕 아래 살았던 국민의당이다. 실제로 민주당은 대선이 끝나자마자 국민의당을 향해 노골적인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대선 직후 박영선 의원은 “국민의당과는 형제당”이라고 말했고, 송영길 의원도 “국민의당은 원래 저희와 같은 뿌리”라고 인연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이낙연 전남도지사를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한 것도 정계개편을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추측을 자아냈다. 문 대통령 입장에선 ‘호남 총리’ 약속을 이행한 것이지만, 국민의당으로선 민주당이 호남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경우 정치적 존립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국민의당뿐 아니라 내심 바른정당도 정계개편 대상에 올릴 의도가 없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른정당 대선후보였던 유승민 의원에 대한 ‘입각 제안설’이 그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이 유 의원에게 경제부총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는 유 의원 개인보다 바른정당 전체를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유 의원 측이 “입각 제안을 받은 일도 없고, 응할 생각도 없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드러내면서 이 같은 정계개편 시나리오는 물 건너가는 듯하지만 완전히 사라질 그림은 아니라는 게 정가의 관측이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은 새 정부 개각 인사를 통해 느슨한 형태의 정계개편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이어갈 전망이다. 여러 정파 사람들을 새 내각에 기용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정계개편을 이뤄내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 시절 “1차 협치 대상은 기존 야권 정당이다. 국민의당, 정의당과는 정책 연대로 함께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민주당이 여러 형태의 야권 통합을 끊임없이 시도할 것으로 점칠 수 있는 대목이다.
민주당이 정계개편을 통한 몸집 불리기에 실패하면 국회선진화법 개정에 나설 가능성도 크다. 현행 국회선진화법 아래서는 원내 의석의 60% 이상을 확보해야 주요 쟁점법안의 처리가 용이하다. 민주당은 원내 1당이 된 20대 국회 들어 국회선진화법 개정을 추진했으나 한국당 등 구여권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내 1당에다 집권여당 지위까지 얻은 민주당은 선진화법 개정을 더 거세게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다.
# 보수진영 통합, 당권 누가 잡느냐에 좌우
자유한국당은 같은 뿌리인 바른정당부터 흔들어대고 있다. 5월 초 바른정당을 탈당한 의원 13명의 복당을 허용한 뒤 양당 구도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당은 바른정당을 완전 흡수한 뒤 무소속 이정현,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 등까지 안아 원내 최다 의석을 보유한 거대 야당이 된다는 꿈을 꾸고 있다.
일단 자유한국당의 강한 의지보다는 바른정당 움직임이 보수진영 통합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바른정당은 대외적으로는 “내 갈 길을 간다”는 입장을 밝히고 나섰다. 한국당과 합칠 생각은 전혀 없고 5월 16일 국민의당과의 통합 문제에 대해서도 사실상 당 대 당 통합을 하지 않기로 결론 내렸다.
바른정당은 15일부터 이틀간 강원도 국회 고성연수원에서 진행된 원내·외 당협위원장 연찬회에서 이같이 의견을 모으고 “소속 국회의원 20인과 당협위원장 전원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이 국민만 바라보며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개혁 보수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김세연 사무총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토론 결과 당내 구성원 중 ‘합당’이나 ‘통합’이란 용어 자체를 쓴 사람이 없다”면서 “사실상 국민의당과의 통합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전했다. 결의문 문구에는 더 이상의 바른정당 의원들의 탈당은 없다는 뜻도 담겨 있다고 당 관계자는 전했다.
바른정당은 소속 의원 13명이 자유한국당으로 재입당하면서 원내 교섭단체 마지노선인 20명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바른정당의 이러한 ‘결의’가 나온 만큼 당분간은 한국당과 바른정당이 각자 도생의 길을 갈 것으로 전망된다. 당분간 서로가 “합치자”며 적극적 재혼 의사를 밝히는 것 보다는 ‘보수 적통’ 자리를 확실히 점하는 노력을 하면서 노선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향후 누가 두 정당의 ‘당권’을 쥐느냐도 보수 진영 정계개편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당 비박계와 바른정당 김무성계가 각각 당을 장악하면 통합론에 속도를 낼 수 있겠지만, 반대로 한국당 친박계와 바른정당 유승민계가 각각 당권을 잡으면 통합 시도는 평행선을 달릴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바른정당 의원들이 “이제 더 안 나간다”는 의지를 내보였지만 내년 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오고 있어 바른정당 탈당 러시가 재개될 여지가 없지는 않다. 문재인 정권 첫 선거인 지방선거에서 보수 세력 궤멸을 우려하는 여론에 밀려 양당이 통합 절차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관측이다. 황영철 의원의 탈당 철회와 정운천 의원 잔류 선언으로 한숨을 돌린 상태지만 지방선거가 임박해오면서 지역 여론이 달라지면 바른정당에 남고 싶어도 남을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추가 탈당이 현실화할 경우 원내 교섭단체 지위를 잃을 바른정당의 붕괴 흐름이 빨라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게다가 지방선거 전 바른정당 의원들의 추가 탈당이 가속하면 한국당으로 사실상 흡수 통합되는 수순으로 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높은 한국당 소속으로 지방선거를 치르고 싶어 하는 지역 조직의 압박에 바른정당 의원 상당수가 한국당 복당을 선택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 호남 잃은 국민의당 선택은
국민의당은 바른정당과 손잡는 것이 가장 무난한 정계개편 시나리오라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 견해다. 국민의당 내부에선 대선 패인 중 하나로 ‘40석 미니정당’의 한계가 지적된다. 바른정당도 의원 1명만 이탈할 경우 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한다. 결국 두 당 모두 캐스팅보트의 존재감을 살리려면 현재보다 몸집을 불려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물밑에서 연대를 모색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박지원 전 대표는 ‘바른정당과 합당하자는 당내 의원이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많다”고 답하기도 했다. 국민의당 김동철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16일 바른정당과의 통합론과 관련, “만약 문재인 정부가 계속 잘못된 행보로 여론으로부터 유리되고 비판에 직면하면 양당이 힘을 합쳐 국민 여론이 동의하는 선에서 노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바른정당과의 연대에는 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이다.
국민의당은 그러나 민주당에 ‘먹히는’ 정계개편은 단호히 막아설 태세다. 김 원내대표는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 제기하는 통합론에 대해선 “완전히 지향점이 다른 정당끼리 통합은 있을 수 없다”며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지향하는 바는 180도 다르다”고 했다. 이어 그는 “민주당은 패권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이고, 국민의당은 그 패권주의를 배격하는 정당”이라고 했다. 민주당과의 연정 문제에 대해서도 “개별의원에 대한 입각제의를 연정의 일환으로 하는 것은 연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연정은 당 대 당으로 하는 것이지 개인과 개인이 가서 하는 게 아니다”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국민의당은 일단 관망할 것으로 보인다. 작은 정당인 만큼 ‘먹힐 가능성’이 큰데 내부 결속부터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120석인 민주당으로선 국민의당 40석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고, 캐스팅보트를 쥘 기회가 앞으로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국민의당 측 입지를 넓혀주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당 측 고민도 크다. 직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양강 구도를 구축할 것으로 예상됐던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양강은커녕 3위로 내려앉은 데다가 텃밭 호남에서도 안 후보의 득표율이 민주당 문재인 대통령에게 크게 밀린 탓이다. 텃밭에서 고전했다는 점에서 국민의당은 바른정당과 비슷한 고민에 휩싸여 있다. 지난해 총선에서 국민의당을 선택한 호남 지역 유권자의 표심이 민주당으로 배를 갈아탄 것이다.
18일 열린 5·18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민주당 정부가 화끈한 액션을 보였다는 점도 국민의당 애간장을 태우는 대목이다. 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진 이번 기념식을 계기로 민주당이 호남 민심을 거머쥔 ‘민주세력의 적통’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는 평가가 호남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최경철 매일신문 정경부장 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