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전 대표가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20대 국회 원(院)구성 등을 논의하기 위해 가진 첫 회동에 앞서 자리 배치를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20분’이었다. 2011년 9월 6일 안철수 전 대표와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의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논의에 걸린 시간이다. 여론조사 지지율이 50%에 육박했던 안 전 대표는 “시장이 돼서 뜻을 잘 펼치시길 바란다”라며 박 시장을 응원했다. 당시 박 이사 지지율은 5%. 안 전 대표의 통큰 양보는 여의도 정치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안철수 신드롬’의 신호탄이었다.
약 1년 뒤 안 전 대표는 제18대 대선에 뛰어들었다. 안 전 대표는 대선 출마 선언에서 여의도 정치권을 향해 “국민들의 삶을 외면하고 국민을 분열시키고 무시하고 싸우기만 한다”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안 전 대표의 도덕적이고 깨끗한 이미지는 기성 정치인 모습과 달랐다. 20~30대 청년층은 의사, 컴퓨터 전문가, 교수 등 안 전 대표가 걸어온 ‘어메이징’한 이력에 열광했다.
하지만 약 6년이 흐른 지금, ‘안철수 신드롬’은 서랍 속 추억에 불과하다. 안 전 대표(21.8%)는 19대 대선에서 ‘더블스코어’ 가까운 차이로 문 대통령(41.%)에 완패했다. 뒤늦게 선거에 뛰어든 홍준표 전 경남지사(24%)에도 뒤졌다. ‘거물급 대선주자 안철수’의 급격한 추락이다. 안 전 대표의 평소 문법에 따르면 문 대통령과 홍 전 지사는 기성 정치권의 대표주자다. 국민들은 안철수표 ‘새정치’에 미래를 맡기지 않았다.
때이른 정계은퇴설도 돌았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안 전 대표는 사실상 정계를 은퇴해야 하지 않겠나. 의원직도 사표를 냈고 3등으로 졌는데 더 이상 정치를 할 명분도 근거도 없다”라고 밝혔다. 정대철 국민의당 상임고문은 “안 전 대표는 대선 패배 책임을 지고 석고대죄해야 한다”라고 보탰다. ‘내우외환’. 안 전 대표의 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압축적인 키워드다.
하지만 안 전 대표는 의지를 다졌다. 안 전 대표는 최근 “5년 뒤 제대로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결선투표 없이도 50% 이상을 지지받을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라며 정계 은퇴설을 일축했다. 일각에서는 낙선 후보가 대선 직후 재도전 의지를 이렇게 빨리 밝히는 것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안 전 대표는 의욕을 보이고 있지만 정치권에서는 ‘여의주를 손에 쥐려면 스스로 고쳐야 할 점이 많다’라는 지적이 들린다. 안 전 대표 최측근은 “솔직히 이번 대선에서 안 전 대표를 좋아해서 찍은 사람이 누가 있나. 반문 정서 때문에 유권자들이 안 전 대표를 선택했다. 대선 기간 동안 안 전 대표에게 ‘반문 전선으로 어떻게 선거를 이길 수 있습니까’라고 계속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가치를 만들고 국민들에게 어필했어야 하는데 안 전 대표가 그것을 못했다. 재도전을 해도 안철수표 새정치가 무엇인지 국민들에게 설명하지 못하면 또 낙선이다”라고 했다.
안철수계 의원은 5월 2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일단 대선 패배에 있어서 안 전 대표 책임이 크다. 후보가 부족한 점도 많았다. 토론과 정책발표에서도 뼈아픈 실책을 했다. 안 전 대표가 대형 단설 유치원 논란에 직접 끼어든 것도 문제였다. 본인의 반성이 우선이다. 반성의 시간을 보낸다면 기회는 다시 올 것”이라고 전했다. 대선 당시 안 전 대표가 꺼낸 대형 단설유치원 신설 제한 공약은 논란을 일으켰다. 안 전 대표는 문 전 대표를 맹추격했지만 단설유치원 공약은 지지율 하락의 원인을 제공했다.
‘청춘의 변심’ 역시 안 전 대표의 극복 과제다. 안 전 대표는 청춘 콘서트로 20~30대 청년층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2012년 대선 출마 직전 안 전 대표는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과 전국 25개 도시를 돌면서 청춘들과 소통했다. 당시 20~30대 청년층 지지는 ‘안철수 대세론’의 중요한 축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청년들 상당수는 안 전 대표를 외면했다. 방송 3사 출구조사에 따르면, 전체 20대 유권자는 안 전 대표(17.9%)보다 문 대통령(47.6%)을 선택했다.
국회 관계자는 “국민의당 창당으로 호남 기득권 의원들과 손을 잡으면서 안 전 대표가 내세웠던 새정치 명분이 사라졌다. 안철수 신드롬에 환상을 품었던 20~30대 지지층 이탈의 원인이다. 사드 말바꾸기 논란 등 지나친 우클릭 때문에 청년들이 돌아섰다”라고 설명했다. 안 전 대표 측근도 “솔직히 박지원 전 대표를 포함해 우리 당 의원 다수 중에 새 정치에 어울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 국민의당과 안 전 대표는 이번 대선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밝혔다.
안 전 대표가 의원 신분이 아니란 점도 또 다른 변수다. 안 전 대표는 대선 후보 등록과 동시에 의원직을 사퇴했다. 앞서의 국회 관계자는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낙선했지만 원내에 있었기 때문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다. 국회의원직은 문 대통령이 재기할 수 있었던 발판이었다. 의원직을 딛고 당대표 선거에 나간 문 대통령은 당내 우군들을 키워냈다. 안 전 대표는 이제 원외인사다. 더욱 열심히 뛰어야 존재감이 부각될 것”이라고 평했다.
국민의당의 내홍 역시 안 전 대표가 풀어야 할 숙제다. 국민의당은 최근 박주선 국회부의장을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하는 과정에서 당내 갈등이 격화됐다. 당초 당내 의원들은 주승용 전 원내대표를 비대위원장으로 추천했지만 동교동계 등 당 고문단이 반발했다. 당 고문단은 주 전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될 경우 탈당하겠다며 정대철 비대위원장 카드로 지도부를 압박했다. 결국 주 전 원내대표는 “대선 패배 책임을 지겠다”며 비대위원장직을 고사했다.
갈등의 본질은 ‘통합론’과 ‘연대론’의 충돌이다. 주 전 원내대표와 호남중진 의원들은 친안 성향 의원들과 함께 제3노선 구축을 위해 바른정당과의 연대론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권노갑 등 동교동계가 주축인 당 고문단은 민주당과의 통합론을 주장해왔다. 국민의당의 ‘투톱’ 안 전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가 한발 물러선 사이 당내 내홍이 수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안철수계 의원은 “당의 존립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이다. 위기의식 때문에 여과 없는 목소리가 이쪽저쪽에서 터져 나온다. 당 고문들이 차라리 민주당하고 합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이들은 당 운명보다 본인들의 추후 입지와 생존이 우선인 분들이다. 주 전 원내대표도 안 전 대표가 바른정당과의 연대를 찬성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그 점도 잘못됐다. 안 전 대표는 바른정당과의 정책연대를 원론적 의미에서 강조했다. 당내 갈등이 빨리 봉합돼야 안 전 대표가 추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합론과 연대론 논쟁은 국민의당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여론조사전문업체 리얼미터 5월 3주차 정당 지지도에 따르면 민주당(53.3%)은 2014년 새정치연합과 합당 이후 최고치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자유한국당(12.4%), 국민의당(7.7%), 바른정당(6.8%), 정의당(6.6%)이 뒤를 이었다. (이번 조사는 2017년 5월 15일부터 19일까지 5일간 전국 전국 성인 2526명 대상으로 실시됐고 응답률은 7.5%,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1.9%p. 자세한 조사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http://www.nesdc.go.kr) 참조.)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안 전 대표가 시험대에 올랐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제이고 소선거구제이기 때문에 양당 친화적이다. 안철수 신드롬과 국민의당 돌풍은 양당 구도의 폐해에서 출발했다. 이 점을 되살릴 묘안이 없다면 안 전 대표는 문국현 한솔섬유 사장의 뒤안길을 따라 걷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 사장은 17대 대선에 창조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깨끗한 이미지로 인기몰이를 했지만 대선이 끝난 뒤 정계를 떠났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안 전 대표는 두 가지 숙제를 안고 있다. 대선에서 득표한 21% 지지를 유지하는 것과 당선을 위해 필요한 20%를 확보해야 한다. 안 전 대표는 이를 위해 국민의당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안 전 대표는 국민의당 창업주다. 회사가 흔들려 부도가 날지 인수합병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창업주가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은 문제가 크다. 지금처럼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대권 재도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보다”라고 분석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