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하루의 반성 기록’이라는 뜻을 지닌 <일성록>(日省錄)은 조선시대 왕들이 자신의 통치에 대해 성찰하고 국정 운영에 참고하기 위해 쓴 일기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일상생활과 학문의 진전 등을 성찰하며 쓴 <존현각 일기>에서 유래했다. 존현각이란 정조가 왕세손 시절부터 머물던 경희궁 내 거처다. 왕위에 오른 후 정조는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 신하들로 하여금 일지를 쓰게 하고, 그 내용에 대해 자신의 승인을 받게 함으로써 <일성록>은 왕의 개인 일기에서 국사에 관한 공식 기록의 성격을 띠게 됐다. 이후 <일성록>은 순조 시대까지 151년간 쓰이며 조선의 왕들이 국정을 파악하고 민심을 돌아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대에 의해 편찬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일성록>은 당대에 기록된 보다 근본적인 사료라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특히 고종, 순조 시대의 <조선왕조실록>이 일제강점기 때 왜곡 편찬된 점을 감안하면, 두 왕의 통치 때 편찬된 <일성록>은 이 시대에 관한 역사기록 중 가장 완벽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성록>에는 지방 관리의 보고서, 의금부와 형조의 죄수 문초 및 판결에 관한 기록, 일반 백성의 상소와 이에 따른 조치, 암행어사의 보고서, 외교 관련 문서와 사신의 보고서 등 다른 역사 기록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이 다수 담겨 있다. 이를 통해 근세 조선을 무대로 한 동서양 간의 정치·문화 교류, 강대국들의 충돌과 각축 같은 세계적인 시대 흐름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의 삶과 사회상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 <일성록>이 고유성과 세계적 중요성 등을 높이 평가 받아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등재된 이유이기도 하다.
<일성록>에 담긴 다양한 기록들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격쟁’(擊錚)에 관한 것이다. 일종의 구두 상소인 격쟁은 조선시대에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왕이 거둥(임금의 나들이)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하소연하던 제도다. 정조 때의 <일성록>에는 격쟁이라는 단어가 무려 688번이나 등장하는데, 이는 정조가 얼마나 백성의 애환에 귀를 기울이려 했는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정조는 격쟁한 백성의 사연을 들으면 신하에게 진상을 파악해 보고하도록 지시하고, 다음날 일일이 그 결과를 챙겼다.
그런가 하면 정조는 특히 살옥(살인사건)에 대한 형조(刑曹)의 복계(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에 대한 조서를 신중히 심사해 임금에게 아뢰는 것)를 꼼꼼히 살피기로 유명했다. 정조 5년(1781) 1월 22일의 <일성록> 기록에는 그가 살인 죄인 45명의 조서를 밤새워 일일이 살펴보고 하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잠시 한 대목을 살펴보자.
“성천부의 살인 죄인 김만황의 사안이다. 독을 먹이고 구타한 것으로 기록했으나 시신에 상처 없고 …술에 독을 탔다는 주장도 증거가 없다. 한 가지라도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오히려 살려 주는데 두 가지나 터무니없으니 어찌 사형을 논하겠는가.”
일기 속에서 정조는 사건에 따라 사형을 유배로 감해주기도 하고, 또한 죄인을 풀어주기도 하며, 관리가 조사를 소홀히 한 데 대해 엄하게 나무라기도 한다. 정조는 이처럼 살옥의 판결에 자신이 신경을 쓰는 이유를 같은 날의 일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살옥은 중대한 일이다. 만약 소홀히 하면 살려줄 만한 사람이 죽기도 하고, 죽여야 할 사람이 살기도 할 것이니 그 원통하고 억울함은 어떠하겠는가. 이러한 부분에 대해 주의해 자세하고 신중히 심리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실로 밤을 새며 고찰하고 판부(형조가 올린 안에 대한 임금의 재가)를 불러주어 쓰게 하였으면서도 피곤한 줄을 몰랐으니 이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정조의 지시로 이복원(조선 후기의 문신)이 쓴 <일성록>의 서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일을 날마다 기록하고 날이 쌓여 해가 된 것이 역사이다. …그러나 역사는 엄하고 비밀스러워 옛날의 역사는 볼 수 있으나 지금의 역사는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옛날을 보는 것은 지금을 살피는 것만 못하고, 남에게서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반추하는 것만 못하다. 이것이 <일성록>이 지어진 까닭이다.”
자기반성과 성찰에 인색한 지도자들이 적지 않은 요즘, <일성록>은 남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왕조 시대의 임금도 이러했을진대, 민주주의 시대의 리더들이라면 더욱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