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분위기가 어수선하죠. 여러 가지 일이 갑자기 한꺼번에 몰리니까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근무하는 한 관계자의 말이다. 중앙지법에서 처음 근무하게 된 이후로 최근까지 단 한 번도 ‘힘들다’라는 말을 해본 적 없다던 그는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도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법원 분위기에 대해 앞서와 비슷하게 설명했다. 그는 “잠깐 지나가는 바람 같으면 걱정도 안 하겠는데, 이런 분위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근 서울중앙지법의 최대 현안은 국정농단 관련 재판이다. 서울중앙지법에선 지난해 12월 19일 최순실 씨,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 8명을 시작으로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까지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굵직한 재판들이 6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선고가 내려지거나 오는 6월 중순 선고를 앞두고 있지만, 대부분의 재판은 박 전 대통령 재판 선고가 내려질 것으로 예상되는 10월께나 돼야 마무리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길어지는 기간만큼 규모도 상당하다. 사건 관련 재판은 총 13개, 검찰 특별수사본부 1, 2기와 박영수 특검에서 사건의 주요 관계자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은 총 21명에 달한다. 여기에 우병우 전 수석 등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은 총 23명이다.
국정농단사건 재판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서울중앙지법에 새 정부의 법원 개혁 회오리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국정농단 재판에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 총 12개 가운데 6개가 투입됐다. 형사합의부 절반이 늦은 오후나 새벽을 넘겨 공판을 마무리하는 등, 역대 최장 심리 시간 기록을 세우면서까지 집중 심리를 벌이고 있지만 재판은 늘 촉박하게 진행된다. 치열한 공방이 오갈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검찰이 제시한 증거 대부분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법정에 세워야 할 증인들이 늘고 있다. 특히 18가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엔 증인이 수백 명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문제는 국정농단 재판이 사건 관련 재판부를 넘어 중앙지법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규모가 상당한 사건인 만큼 담당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단, 법원 직원 등의 피로도가 높은 건 ‘어쩔 수 없다’는 푸념이 나오지만, 이 사건이 다른 재판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나오는 우려의 목소리가 최근 들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지법 형사합의부의 업무 부담 문제가 첫 번째로 꼽힌다. 국정농단 재판부에게 다른 사건이 배당되지 않으면서 나머지 재판부의 업무가 두 배로 늘어났다.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부 판사 출신 변호사는 “형사합의부 절반이 투입된 일은 법원 역사상 처음일 것”이라며 “그 외의 재판부는 제한된 시간 안에 더 많은 사건을 심리해야 한다. 재판부의 피로도도 문제지만, 심리에도 영향이 미칠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도 “판사들이 묵묵히 업무를 보고 있지만 피로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정농단 재판이 하루에도 수 개씩 동시에 열리면서 법정 ‘교통정리’도 쉽지 않다. 박 전 대통령 재판이 본격적으로 열린 뒤부터는 더욱 심해졌다. 서울법원종합청사 대법정에서 진행되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건은 박 전 대통령 재판에 밀려 중법정에서 열리고 있고, 이에 따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의 ‘블랙리스트’ 관련 재판은 소법정으로 밀려났다. 정해진 공판 외에도 필요하면 추가로 열릴 가능성도 높아 혼란은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게 법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서울중앙지법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사안은 또 있다. 지난 3월 촉발된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 때문이다. 법원행정처가 일선 판사들의 사법개혁 논의 학술행사를 저지하고 관련 판사에 대해 부당한 인사 조치를 취했다는 의혹이 번지면서 이례적으로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다.
특히 사건은 여전히 판사들 사이에서 시각차가 극명하게 갈린다. 앞서의 진상조사위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는 모호한 결과를 내놓으면서부터다. 법원행정처 사정을 잘 알거나 근무를 했던 일부 판사들은 “블랙리스트는 없었다”고 발표한 앞서의 진상조사위의 결론에 동의하고 있다. 법원행정처를 거쳐 온 한 판사는 “대법원이 일부 판사들에게 불이익을 줄 이유가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법원행정처 사정에 밝은 또 다른 판사는 진상조사위 결과 발표 이후에도 계속되는 의혹에 대해 불쾌함을 비추기도 했다.
반면 일선 판사들의 생각은 정 반대다. 서울중앙지법 판사들을 중심으로 전국의 일선 판사들은 의혹 해소와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는 성명을 공식적으로 내고 있다. 지난 5월 15일 서울중앙지법 판사들이 강한 유감을 표명하면서 전국법관대표회의 개최를 요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블랙리스트가 저장돼 있다는 컴퓨터는 조사하지 않고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걸 없다고 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내부의 ‘법원 개혁’ 움직임에 더해 외부에서의 개혁도 예고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22일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법무비서관에 김형연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를 임명했다. 김 비서관은 그동안 대법원장에 집중된 권한 분산과 사법행정 체계 혁파 등 사법부 내 산적한 현안에 대한 문제를 가장 선두에서 제기해왔다. 특히 김 비서관은 앞서의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의 중심에 섰던 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로 활동했으며, 법원 내부 게시판에 ‘진상조사를 청원한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법원 개혁 1호 대상’으로 법원행정처 권한 분산이 꼽히는 가운데, 법조계에선 중앙지법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 부장판사 10명 가운데 8명이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부터다. 이들의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률이 다른 판사들보다 3배가량 높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장을 보좌하거나 각종 법원 행정‧인사‧감사 등을 담당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앞으로 ‘법원 개혁’으로 인한 서울지방법원 내부 진통은 더욱 극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 서울지방법원의 판사는 “‘서울중앙지법 형사부는 고등법원 승진 통로’라는 일선 판사들의 여론이 높다”며 “대법원장과 가까이 있던 판사들(행정처 출신)이 중앙지법 형사합의부나 영장전담부에 주로 배치돼 왔고, 이후 고법부장 승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법원장과 가까운 승진 통로가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 재판부가 민감한 재판에서 소신껏 판결하기 어려워진다“며 ”법관의 독립성이 흔들리면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