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걸린 국정기획자문위원회 현판. 이번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서는 “금융감독체계 개편과 관련한 논의는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박은숙 기자
지난 4월 26일, 박광온 국정기획자문위원회 대변인은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던 금융감독체계 개편이 ‘당분간’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박 대변인은 이날 “이번 국정기획자문위에서는 금융감독체계 개편과 관련한 논의는 하지 않는다”면서 “정권 초에는 해당 내용을 논의하지 않을뿐더러 금융위원회의 업무보고 내용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금융감독체계 개편은 내년 개헌을 추진할 때 다뤄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당분간’ 논의를 미룬다는 것이지만, 금융권에서는 이번 발표를 “물 건너갔다”로 해석한다. 힘이 가장 막강한 정권 초기에 밀어붙여도 성공 여부를 장담하기 힘든 관료조직 개편을 해를 넘기도록 미룬다는 것은 사실상 포기한다는 의미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당시 효율적인 금융관리·감독체계 구축을 위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의 금융정책과 금융감독 기능을 명확히 분리하는 금융감독체계 개편을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금융위와 금감원에 혼재돼 있는 정책과 감독 기능을 명확히 분리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공약 중에는 금융소비자 보호를 강화하는 내용도 있다. 금융소비자보호법(가칭)을 제정하고, 금융소비자전담기구를 별도로 설치해 금융소비자 보호를 강화하겠다는 공약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더미래연구소도 최근 참여정부 시절 금융감독위원회의 ‘부활’을 내용으로 한 감독체계 개편안을 내놨다. 금융위의 정책 권한은 기획재정부로 넘기고, 감독 권한을 총괄하는 금감위를 신설해 금감원에 통합시키는 안이다. 정무위 소속인 최운열 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여러 의원이 이와 관련한 개정안까지 발의한 상태다.
만약 이대로 조직개편이 추진될 경우 금융감독 기능은 금감원이 전담하고, 소비자보호기능은 전담기구가 도맡아한다. 반면 금융위는 신설되는 재정금융부(금융부)로 흡수되거나 감독 기능을 상실해 존폐의 기로에 놓인다. 국내 금융정책의 최고 의사결정권자 역할을 해온 금융위가 반발하는 것은 어찌 보면 예고된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금융위는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내부적으로 현 감독체계와 지금까지 거론된 감독체계의 장단점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위 개편에 대비하기 위해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셈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구상이 위법 소지가 있다는 학계 의견을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에게 전달하는 등 본격적인 저항에 나서기도 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는 금융감독 기능을 무자본 특수법인인 금융감독원으로 이관해 감독 기능을 총괄하게 하면 헌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는 일부 헌법학자들의 의견을 전달했다는 전언이다.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고 규정한 헌법 제66조 4항과 충돌할 수 있다는 논리다. 또 금융위는 고위층을 중심으로 국회의원들을 접촉해 지금은 금융감독체계 개편보다 가계부채나 기업구조조정 등이 우선이라며 시기상조론을 설파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이종현 기자
금융위의 이러한 논리가 먹혀든 것인지 문재인 정부는 가계부채 문제 해결을 주요 정책과제로 삼고 별도의 전담기구 설치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도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국토부 등이 포함된 비정기 협의체가 운영되고 있는 만큼 전담기구가 설치되면 정책 컨트롤타워가 될 전망이다.
현재 가계부채 문제는 기재부, 금융위, 금융감독원, 국토부, 한국은행 등 유관기관으로 구성된 ‘가계부채 관리협의체’에서 다루고 있다. 기재부 주관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회의를 연다. 가계부채 전담기구가 설치된다면 이러한 부처들을 아우르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렇게 될 경우 새 정부 조직개편 작업의 무게추가 ‘가계부채 전담조직 신설’로 급격히 이동하면서 ‘금융위 해체론’은 물밑으로 가라앉을 것으로 금융권은 보고 있다.
정부는 아직 구체적으로 검토해본 내용은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박광온 대변인은 최근 브리핑에서 “가계부채와 관련해서는 전담기구를 별도로 둘지 현재 구조에서 다룰지 논의될 수 있지만 아직 대책반을 꾸리는 단계도 아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전날 수석보좌관들에게 다음 회의 때 가계부채 대책을 논의하자는 숙제를 내는 등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금융당국 조직개편 문제와도 연관돼 있어 쉽게 속도를 내긴 어렵다. 문재인 정부는 기재부와 금융위, 금감원의 조직개편 문제는 당장 정권 초기에 다루진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관계자는 “가계부채 문제는 부동산이나 내수시장 등과 연결된 복합적 사안이기 때문에 이를 전담할 기구가 꾸려지면 사실상 정책총괄기능을 수행하게 될 것으로 본다”면서 “이 경우 금융감독기구 재편 논의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리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이처럼 금융당국의 체계 개편이 국정기획자문위에서 초기 과제로 추진되지 않으면서 정권 내 현실화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과거 전례를 볼 때 금융감독체계 개편은 정권의 정책추진 동력이 가장 강력한 출범 초기에 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의 금융감독위원회와 이명박 정부의 금융위원회는 모두 정권 출범 첫 해에 설립됐다.
금융당국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워낙 복잡한 데다 현안도 많은 만큼 초기에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면 온갖 잡음과 저항 등에 부딪혀 동력을 상실하기 쉽다는 것이 금융권의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내년 이후 개헌작업이 진행되면 또 다른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개헌 자체가 국가의 큰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것인 만큼 금융감독체계 개편이라는 ‘작은 그림’은 세부 내용으로 충분히 포함시킬 수 있다는 논리다. 금융권의 또 다른 관계자는 “금융위라는 엘리트 조직이 가진 잠재력은 결코 작은 수준이 아니다”면서 “생각처럼 쉽게 없애거나 기능을 줄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