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공여 혐의 등으로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 2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8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원에 도착한 뒤 미소를 지으며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재계 안팎에선 이 부회장의 미소를 놓고 그 의미를 둘러싼 여러 해석을 내놨다. 재판을 참관하고 있는 삼성 임원들에게 보낸 미소라는 주장부터 평소 잘 웃던 습관이 부지불식간 터져 나온 것이란 주장까지 다양했다.
그런데 이 부회장의 미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1월 19일 이 부회장은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미소를 지으며 법원을 빠져나왔다. 법조계 관계자는 “상식적으로 본인에게 유리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언론에 노출될 것이 분명한데 미소를 지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른바 ‘이재용 무죄설’이 재계는 물론 법조계 및 정치권으로 확산되고 있다. 시나리오는 각기 다르지만 ‘현재 수집한 증거만으로 뇌물죄 적용이 불가능하므로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 기간이 만료되는 오는 8월 말쯤 무죄가 선고될 것’이란 내용이 핵심이다. 여기에 법원 판결이 사실상 판가름났다는 주장이 덧붙여진다.
재계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이재용 무죄설이 검찰 내부에서 흘러나와 청와대까지 파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연히 이 부회장도 보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나도 그 무죄설을 들어 알고 있다”며 “삼성으로서는 무죄설이 퍼지는 게 재판에 불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특검은 이 부회장을 구속기소하면서 ‘최순실 삼성 뇌물 요구→최순실 대통령 공모→대통령 이 부회장 독대→대통령 삼성에 대가 제공→삼성 정유라 지원’이라는 ‘뇌물죄 고리’를 구성했다. 이 가운데 최순실이 삼성에 뇌물을 요구한 것과 삼성이 최순실의 딸인 정유라를 지원한 것은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입증이 가능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최순실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모 부분은 실제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복기가 불가능하다.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의 대화 또한 추론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 독대 당시 활용한 ‘대통령 말씀자료’에는 삼성 경영권에 대한 내용이 명시돼 있다. 삼성 외에 대통령과 독대한 다른 대기업 총수도 ‘대통령 말씀자료’에 담긴 질문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즉 이 부회장 역시 삼성 경영권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독대 당시 삼성물산 합병 등의 대가 요구는 없었다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 청와대의 압력을 받고 강제 모금에 응했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뇌물죄가 성립하기 위해선 ▲공직자인 A가 B에게 뇌물을 요구하고(요구) ▲B가 언제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하고(약속) ▲B가 실제 금품을 전달하고(공여) ▲최종적으로 A가 금품을 받는(수수) 뇌물죄 고리가 형성돼야 하는데 A와 B 모두 범행을 부인하는 상황에선 일반적으로 ‘약속’을 입증하기 쉽지 않다”며 “결과적으로 독대를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과 통화한 정황 증거 등을 법원이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2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특검사무실에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 중인 윤석열 특검 수사팀장(현 서울중앙지검장)이 출근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지난 2월 이 부회장 구속으로 쾌속순항하던 특검은 공판이 반환점을 돈 지난 5월부터 이 부회장 측 변호인인 법무법인 태평양의 거센 반격을 받고 있다. “증거는 차고 넘친다”고 자신했던 것과 달리 대부분 증거가 기소 전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오히려 피고가 방어할 시간을 벌게 됐다. 최근 덴마크에서 강제 송환된 정유라가 구속을 면한 것이나 지난 2일 재판에 출석한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이 ‘삼성그룹 순환출자 해소 과정에서 청와대나 삼성의 압력을 받은 적이 없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은 호재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19일 신임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윤석열 전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팀장(당시 대전고검 검사)을 깜짝 임명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수사’의 공소유지를 맡을 적임자란 이유에서였다. 실제 윤 지검장은 취임 일성으로 삼성 재판을 언급하며 이 부회장 측을 압박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수사의 성패는 ‘최순실→박근혜→이재용’으로 이뤄지는 뇌물죄 성립 여부에 달려 있다. 이 가운데 민간인 신분이면서 측근들이 등을 돌린 최순실과 달리 이 부회장은 거대 로펌의 지원을 받는 데다 측근들 역시 조직적인 방어전략을 펴고 있어 특검의 고민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만약 이 부회장이 무죄를 받고, 그 여파로 박 전 대통령마저 무죄로 풀려난다면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릴 공산이 크다. 더욱이 삼성가(家) 출신인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을 청와대 외교안보특보로 임명한 문재인 정부로서는 이 부회장의 무죄 판결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법조계 안팎에선 홍 특보가 결국에는 이 부회장을 도울 것이란 말도 나온다. 삼성 출신 대기업 관계자는 “이른바 친박계 정치세력이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이재용 무죄설을 비롯한 각종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데 (검찰이) 흔들려선 안 된다”며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의 핸드폰 등 확보한 증거만으로 뇌물죄 적용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특검은 이 부회장 재판에 박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르면 이달 말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은 한 법정에서 만나 대질심문을 받을 전망이다. 가능성이 적긴 하지만 대질심문에서 특검이 두 피고의 역공을 받는다면 무죄설은 더욱 힘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삼성은 “진행 중인 재판에 대해선 결과를 말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
법정 밖 이재용 돕는 사람들 ‘흑기사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 재판이 핵심 증인의 진술번복으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최순실의 최측근으로 지목된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는 “삼성의 승마 지원이 삼성 경영권 승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안다”던 기존 진술을 뒤집고 ‘확실하지 않다’고 증언했다. 이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대가로 최순실이 말을 지원받았다’던 입장에서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삼성의 순환출자 문제를 해소시켜준 공정거래위원회는 전·현직 임원이 모두 청탁 의혹을 부인하고 나섰다.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은 법정에 나와 “청와대와 삼성의 압력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고, 김학현 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은 “삼성 측의 청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김 전 위원장은 공정위 내부에서 삼성의 순환출자 문제가 논의됐을 당시 김종중 전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과 만나는 등 삼성과 공정위의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과 대립 관계에 놓인 공정위가 거꾸로 삼성에 유리한 증언을 잇달아 내놓은 것이다. 금융업계 임원 가운데도 삼성 재판을 돕는 ‘흑기사’가 있다는 의혹이 나온다. 삼성 출신인 A 씨는 지난 4월께 휴가를 내고 삼성 측 변호인과 회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씨는 “전혀 사실무근이다“며 ”당시 (휴가가 아닌) 외부 일정이 있어 해외에 체류 중이었다“고 반박했다. 이 부회장의 조력자는 삼성을 수사한 검찰 안에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사정기관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검찰 특수본이 삼성 미래전략실을 압수수색했을 때 수사관들이 미래전략실 VDI(가상 데스크톱)를 열려 하자 검찰 수뇌부가 현장에 전화를 걸어 압수수색 인력을 철수시킨 적이 있다. VDI에 민감한 정보가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내 조력자로는 B 검사 등이 조심스레 거론된다. 지난 1기 특수본 수사 당시 삼성 등 대기업은 뇌물공여자가 아닌 피해자로 공소장에 묘사됐다.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