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8일 오전 청와대 여민1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6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정리하고 있는 지방정책 국정과제 속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꼭 포함시켜줬으면 좋겠다. 우리 고대사가 삼국사 이후부터 되다보니 그 이전의 역사, 고대사가 제대로 안된 측면이 있고 특히 가야사는 신라사에 덮여서 제대로 연구가 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가야는 한반도 남쪽에 있었던 변한의 12개 작은 나라들을 통합해 세운 연맹왕국이다. 삼국시대 무렵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등 여섯 나라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 “상고 적에 지역이 백리 되는 나라가 이 도 안에 매우 많았으나 신라가 건국하면서 통일하였다”라고 기록된 나라가 가야다.
문 대통령이 제시한 가야사 복원의 목적은 ‘동서화합’이다. 문 대통령은 가야사 복원 지시 직후 “보통 가야사가 경남을 중심으로 경북까지 미치는 역사로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사실 더 넓다. 섬진강 주변, 광양만, 순천만, 심지어는 남원 일대,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들이 남아있다. 그때까지 그 정도로 아주 넓었던 역사이기 때문에 가야사 연구 복원은 영·호남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어서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고 생각된다”라고 재차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을 두고 역사학계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계승범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6월 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최고 통수권자가 특정 학문의 어떤 분야에 대해 복원하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21세기 민주사회에서 맞지 않다. 대통령 언행은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다. 최고 통수권자가 지역적 연구주제에 대해서 훈수를 뒀다. 동서화합은 현대사에서 생긴 문제다. 현대사에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가야사를 복원한다고 해서 동서화합이 되겠나. 정치적 명분은 그럴 듯하지만 바둑으로 비유하면 완착이다. 잘못된 수다”라고 비판했다.
심재훈 단국대 사학과 교수도 6월 4일 페이스북에 “연구가 부족한 건 자료 부족이라는 현실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 고고학 자료들이 나오고 있지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많은 돈이 무분별하게 투입될까봐 걱정인데 관련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 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본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역사에 개입하려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전근대적이다”라고 비판했다. 계승범 교수 역시 “문 대통령이 뜬금없이 가야사 확대 복원을 지시했다. 왜 ‘정치’가 ‘역사학’을 지배하려는가. 새 정권에 줄을 대어 군불 때는 이들은 과연 역사학자인가, 아니면 폴리페서인가”라고 우려를 드려냈다.
문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 후보자로 낙점한 도종환 의원의 가야사에 대한 언급을 두고도 구설이 일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실효 지배했다는 내용으로 일제의 식민사관이 담긴 학설이다. 도 의원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를 가야라고 주장했는데 일본의 연구비 지원으로 이 주장을 쓴 국내 역사학자들 논문이 많다. 여기에 대응해야 한다. 관련 자료들을 찾아놨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고고학자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6월 6일 페이스북에 “일본 연구비를 받아서 임나일본부에 동조하는 연구자를 다 찾아 놓았단다. 그런 연구자가 있다면 근거를 분명히 하여 밝혀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 바뀌면 정치권이 역사연구를 주무르는 상황에서 벗어날 것이라 기대했었다. 헛된 꿈이었다”라고 밝혔다.
정치권 일각에선 “가야사 복원 지시는 경북과 경남 민심을 의식한 측면이 있다”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남과 경북 지역은 지난 대선에서 문 대통령에게 쓰디쓴 패배를 안겨줬다. 문 대통령은 대구·경북·경남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승리했다. 문 대통령 득표율은 대구 21.8%, 경북 21.7%, 경남 36.7%였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가야사 복원은 반문정서가 심했던 TK 민심 회복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경북 고령군은 가야 문화 관련 사업을 꽤 오랫동안 준비하고 기다려왔다. 사업이 지지부진했는데 대통령이 비서관회의에서 언급을 해주니 지역의 기대감이 남다를 것”이라고 전했다.
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지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역사 정책을 계승하는 측면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2001년 7월 19일 가야문화사업 기공식에서 “가락국은 당시 앞선 토기와 철기 문화로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던 문명 국가였다. 하지만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가야국이 통일신라시대부터 역사 속에서 실종됐고 문헌사료 빈곤으로 국가적 관심에서 소외됐다”라고 밝혔다. 김대중 정부는 가야사 1단계 복원사업으로 2000년부터 4년간 대성동고분군 등 문화재 발굴과 복원에 예산 1290억 원을 집행했다.
금관가야의 중심지인 김해시는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김수로왕이 인도 출신인 허 황후(허황옥)와 결혼한 설화를 언급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가야사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 측근은 “노 전 대통령은 가야사에 관심이 깊었다. 노 전 대통령이 고시공부를 김해시에 있는 장유암이라는 절에서 했다. 김수로왕의 처남인 허황후의 오빠가 승려였는데 그 사람이 지은 절이 장유암이라고 들었다”라고 설명했다.
김해시는 들썩이는 모습이다. 허성곤 김해시장은 최근 “문재인 정부의 가야사 복원 방침을 환영한다. 제대로 된 역사 발굴과 복원 등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라며 ‘가야역사문화도시 지정 및 육성 대책’을 발표했다. 김해시는 경주와 공주, 부여처럼 문체부의 지역거점 문화도시로 지정받아 가야왕도의 위상을 확립할 예정이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지자체의 가야사 복원 움직임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익명을 요구한 사학과 교수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신라사에 공을 들여 다른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던 것은 맞다. 경주에 엄청난 돈이 들어갔다. 하지만 부작용이 우려된다. 지자체에 얼마나 많은 로비가 들어가겠나. 역사 복원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학술적인 부분엔 10% 정도만 투자되고 예산 대부분은 조형물 세우기와 행사로 쓰여지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꼬집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