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통해 접근한 외국인들의 신종 보이스피싱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귀신에 홀렸던 것만 같다.”
최근 한 보이스피싱 수법에 속은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한 말이다. 이들의 말은 하나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모습을 접했을 땐 ‘누가 저런 수법에 속을까’ 싶었지만, 막상 자신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니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다고.
피해자들을 속인 일당은 전통적인 보이스피싱 조직과는 달랐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푸른 눈과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실제 외국인’이었다.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돈을 요구하는 일도 없었다. 그들은 SNS로 피해자들에게 접근해 자신의 신원을 노출했고, 상당한 기간을 들여 친근하고 달콤한 말로 경계를 풀었다.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생활과 삶에 녹아든 ‘외국인 친구’를 사기꾼이라고 의심했던 피해자들은 없었다.
# 삶에 녹아드는 ‘친구’ 또는 ‘사기꾼’
선교사 권 아무개 씨(여‧60)는 지난 3월 페이스북에서 한 미국인 남성에게 친구 신청을 받았다. 6년 전부터 페이스북을 사용해오던 권 씨에겐 외국인의 친구 신청은 익숙한 일이었다.
이 남성은 그동안 권 씨가 보던 외국인들과는 달랐다. 자신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미 해병대 장교로 복무 중이라고 소개한 남성은, 사진 속에서 계급장이 달려있는 정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특히 눈에 띈 건, 정보 카테고리에 적힌 성경 구절이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권 씨가 늘 외우고 다녔던 그 구절이었다.
남성은 권 씨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신이 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한국군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가족 가운데 예비역 장교 출신이 있는 데다, 선교 활동을 통해 군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권 씨는 이 남성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점차 페이스북 메시지로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한 달 뒤, 남성이 갑자기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달러가 든 상자를 택배로 보낼테니, 보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두 달 뒤 직접 한국에 방문해 본국(미국)으로 보낼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권 씨가 “나를 어떻게 믿고 보내느냐” “직접 미국으로 보내면 되지 않느냐” 등등을 물었지만 남성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여기는 최근 공중 폭격을 받아 긴박한 상황이다. 은행이 곧 폐쇄될 예정이다”며 “비밀스러운 돈이라 직접 미국으로 보낼 수 없다. 직원이 따로 연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메시지를 받은 뒤, 권 씨에게 해외 전화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자신을 ‘비밀 에이전트’라고 소개한 또 다른 남성은 앞서의 남성의 이름을 말하며 택배를 보낼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권 씨가 녹음한 전화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그는 “일반 화물이 아닌 비공식 외교루트를 통해 보낼 예정이다. 택배를 받고 보관만 해주면 된다”고 말했다. 이후 페이스북의 남성과 전화 속 남성의 연락이 잦아졌다. 이들은 자신의 여권 사본을 보내거나 집 주소, 전화번호 등을 알려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권 씨의 SNS 친구인 외국인 남성은 권 씨에게 자신이 근무 중인 미 해병대 캠프에 공중 폭격이 있었다며, 미국 정부 몰래 모아둔 돈을 급히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싶다고 권 씨를 설득했다. 그는 요원의 도움을 받아 유엔 안보 담당관과 외교 면제 특송 서비스 등을 통해 달러가 든 택배를 보내겠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권 씨가 제안을 승낙하자 갑자기 택배비와 ‘해외 거래 인증서 발급’ 등의 명목으로 400만 원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물건(달러)’이 한국에 무사히 도착하면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권 씨는 의심 없이 돈을 보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주 뒤, 다급한 목소리로 ‘에이전트’라는 남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택배가 한국 세관에 적발됐다는 내용이었다. 전화 속 남성은 “돈을 주면 금방 해결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해외에 있어 어렵다”며 “대신 이 돈을 내주면 택배를 받은 뒤 추가로 30만 달러를 더 주겠다”고 설득했다. 급하게 돈을 마련해야 했던 권 씨는 모아뒀던 돈에 카드론까지 받아 두 차례에 걸쳐 이들에게 총 8000만 원을 보냈다.
외국인들은 돈을 받은 후에도 연락을 끊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권 씨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와 이메일을 보내 “곧 한국에 직접 들어가겠다”거나, 상황에 맞는 성경 구절을 들려주며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며 추가로 송금할 것을 요구했다.
권 씨가 이들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지난 5월 중순이다. 우연히 뉴스에서 마크 밀리 미국 육군 참모총장의 사진을 본 것. 앞서의 남성이 페이스북에 올려놨던 사진과 같았다. 권 씨는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현재 수사 중이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 사건에 관련된 남성들은 모두 실제로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으로 확인됐다.
# 명확한 규정이 어려운 신종 수법
문제는 이런 형태의 보이스피싱 범죄가 비슷한 시기에, 여성들을 상대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신고를 접수하고 수사에 착수한 경찰서도 서울, 부산, 대전 등 전국에 걸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피해자들의 세부적인 피해 내용과 금액은 각각 달랐지만, 큰 틀에서 다르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대부분 올해 초 페이스북을 통해 처음 보는 외국인으로부터 친구 신청을 받았다. 피해자들이 전체 공개로 올려둔 종교나 음악, 영화 등의 관심사나 취미활동을 언급했고, 이후에는 자신을 사업가 또는 글로벌 기업 임원 등으로 소개하며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주는 등 묻지 않아도 신원을 공개했다. 외국인들은 공통의 관심사를 통해 친근감을 보여주거나 고민 상담을 했고, 또는 달콤한 말로 ‘사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돈을 요구하는 방식도 앞서의 권 씨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보관만 하면 되는 택배, 또는 명품 가방이나 귀중품 등을 선물하겠다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택배비 등 명목으로 소액을 요구한 뒤 “세관에 적발됐다”며 급하게 추가 송금을 요구한다. 돈을 받은 이후에도 연락을 끊지 않는 점도 공통점이다. 현재 이런 수법의 보이스피싱을 수사 중인 한 경찰 관계자는 “구체적인 수사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최근까지 확인된 내용과 정황상 개인이 아닌 조직 형태로 추정된다”고 귀띔했다.
이런 보이스피싱 수법의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수사 과정에서 은행과 경찰의 의견이 갈리기 때문이다. 은행은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보이스피싱 범죄가 확인되면 송금한 계좌에 대해 지급 정지를 하면서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엔 ‘택배 수령’을 목적으로 돈을 송금했다는 이유로 일부 은행은 보이스피싱이 아닌 ‘물품사기’로 판단하고 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수법이 진화하면서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명확하게 어떤 사기 범죄인지 규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도 “보이스피싱에 무게를 두고 수사 중이며, 은행에도 이 같은 취지로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