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학·문장·절의 겸한 호남 큰 선비 ‘조선유학’ 부흥
[일요신문] 전라도 정도 1천년 ‘하서 김인후의 생애와 사상’ 학술 심포지엄이 지난달 23일 오후 장성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이개호 국회의원, 광주매일신문, 광주전남연구원, (사)한국학호남진흥원, 장성군 공동 주최로 열렸다
오는 2018년은 전라도 정도 1천년이 된다. 즉 고려 현종 9년(1018년) 강남도(江南道)와 해양도(海陽道)를 합쳐 전라도(全羅道)로 명명된 지 1천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그 일환으로 지난 5월 23일 전남 장성 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하서 김인후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하서 김인후는 장성 황룡면 맥동마을 출생으로 조선 중기 도학과 절의, 문장을 겸비한 탁월한 학자로 꼽힌다. 이날 심포지엄은 이개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광주매일신문, 광주전남연구원, (사)한국학호남진흥원, 장성군이 공동 주최했다. 심포지엄에서는 오종일 전주대 명예교수가 주제발표를 했으며, 김재수 한국학호남진흥원 이사의 사회로 김덕진 광주교대 교수, 박명희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김봉곤 필암서원 산앙회 이사 등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학술심포지엄의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전라도 천년 기념사업의 성공적 추진 과제로는 우선 광주시와 전남도민뿐만 아니라 전국민을 대상으로 전라도의 역사를 바로 알리고 이해할 수 있도록 역사 재조명과 교육 및 홍보 등이 적극 추진돼야 한다.
또 사업추진의 전 과정에 행정은 물론, 전문가, 유관기관 및 단체, 시도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나아가 기념사업에 포함되지 않은 사업도 추가 발굴하거나 관련 사업과 연계 추진해 파급효과를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시·군 단위에서도 기념사업에 참여하거나 관련 사업을 발굴해 연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기념사업 예산 확보에 공동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전라도 천년 기념사업과 같은 역사기념사업은 국비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향후 또 다른 역사기념사업 추진의 기초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기념사업 추진 전 과정을 기록해 기념사업 백서를 발간해야 한다.
장성군의 대응과제로는 수많은 역사인물, 문화유산, 자연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점을 활용해 전라도 천년 및 담양군 천년 기념사업과 연계 추진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전라도 천년 기념사업 중에서 2018년 전라도 방문의 해, 광역투어버스 운영, 해외 호남향우 방문행사 등의 세부 사업계획을 파악해 국내·외 관광객을 장성군으로 유치하기 위한 연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전라도 천년 기념사업을 통해 전라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고, 전라도의 정체성 확립과 전라도인의 자긍심을 회복해야 한다. 아울러 기념사업의 공동 추진을 통해 3개 시·도민의 화합과 상생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에 머물러서는 미래가 없다. 전라도 천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도시 및 지역발전의 거점공간의 역할을 하게 될 랜드마크 조성, 천년 문화유산 복원, 천년 숲 조성 등의 성공적 추진에 역점을 기울여야 한다.
‘조선유학에 있어서 하서선생의 학문과 그 위상’에 대한 논의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하서(河西 金麟厚 1510-1560) 선생이 생존했던 시기는 중종조에서 명종조 중기에 이르는 기간이었으니, 중종반정으로 인해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림의 정서가 팽배할 때였다.
사림이 추구했던 도학 정신은 유학의 근본정신, 곧 참다운 도를 실현해 백성을 다스리고자 했던 이념이었다. 이는 충군 의리정신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연산군의 학정으로부터 중종반정으로 인해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한 사림의 이상으로서 형성되어진 그 시대의식이라 할 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포은의 절의를 잇고, 사림의 도학을 진일보 해 학문적 정립을 이룩해 성리학의 문호를 열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절의와 도학 그리고 성리학의 발전과정에서 선생이 기여한 업적을 말한 것이다.
조선유학의 발전 현상으로서 선생의 시대를 본다면, 그 시기는 사림들이 사화를 피해 독선기신(獨善其身)하면서 참다운 도를 탐구하기 시작했던 때였다. 따라서 시대적으로는 포은의 절의를 계승해 도학을 실현하고 성리학의 문을 열었던 때였다.
선생의 문학세계는 도의 근원을 밝히려는 의지로 나타난 시세계는 도학 연원을 시의 주제로 해, 성리학의 명제는 물론, 도를 실현했던 역사와 사상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인종을 향한 절의정신이 그 중요한 내용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선생을 성리학적 위상으로서 주렴계, 학문적으로 호남의 수사(洙泗)라고 한 것은 조선조 성리학과 유학의 역사에 선생이 차지하는 그 위상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할 것이다.
선생의 행의는 의리를 변치 않고 그 문학의 영향은 조선조 문학의 전성시대를 열게 됐으니, 이러한 특징들이 선생을 가리켜, 도학과 문장, 절의를 겸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서 선생이 평생토록 특별히 연구한 것은 대학이었다. 대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필요한 윤리나 철학을 담고 있는 유교경전으로 이해되고 있다. 구시대적인 훈척정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림정치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대학의 이론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서는 대학을 강조했을 것 같다.
당시에는 훈구 재상들이 젊은 문신들을 내몰아 죽이거나 혹은 유배시키는 사회혼란이 심화됐는데 이러한 사회문제를 과감하게 지적했다. 즉 현재 한국 정치에서 형성되고 있는 적폐청산을 16세기 당시에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인종의 죽음을 기화로 36세때 벼슬을 그만둔 후 45세까지 수차례에 걸쳐 나라의 부름이 있었지만 극구 사양하고 순창에 초당을 짓고 실의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실망을 떨치고 심신을 가다듬어 학문에 열중했다.
하서 본인 스스로 대학 한 권에는 격물·치지·성의·정심의 공력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효험이 모두 들어 있어 이것을 버리면 그 어떤 것도 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아끼는 제자이자 사위인 조희문과 양자징에게 준 시에서 대학을 반 평생 공부해도 아직도 근원을 찾지 못했다고 했고, 대학을 사람들이 천하게 보지만, 성공은 이것 아니면 강구하기 어렵고 대학을 옳게 못 읽어 공부만 허비하고 일신의 공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해 대학을 중시하도록 했다.
그는 대학을 강조했지만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아 향후 좀더 세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서 이후 제자를 포함한 전라도 선비들이 임란의병이나 한말 항일의병 등 현실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도 하서의 대학 강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인후의 시에 대한 비평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시작(詩作)의 천부적인 재능을 부각한 경우에 대한 기록은 하서전집, 임하필기, 연려실기술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순발력이 뛰어나다는 점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김인후는 다섯 살과 여섯 살 때 벌써 시를 지었고, 열아홉 살 때는 당시 대제학이던 이행에게 큰 칭찬을 받았다. 시를 창작하는 상황에 따른 순발력에 뛰어나 30세와 36세 때 당시 중국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접대하는 제술의 직무를 직·간접으로 맡기도 했다.
또 인품과 시를 연결지어 설명한 경우에 대한 기록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동각잡기와 연려실기술 등의 글에 보인다. 시의 연원과 성격을 규정한 기록으로는 박세채가 쓴 ‘행장’과 조희문이 쓴 서문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인후는 학자이면서 1천600여 수의 시를 남긴 시인이다.
이어 김인후 시의 성격을 규정했는데, ‘맑으면서도 격하지 않고, 곧으면서도 박절하지 않으며, 즐거우면서도 조용하고 화기로운 기품이 있고, 근심하면서도 원망하고 슬퍼하는 뜻이 적다’고 해 감정의 절제와 중용의 미덕을 보였음을 밝혔다. 아무리 느낌을 거리낌 없이 나타내는 시일지라도 학자적인 자세와 면모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음에 초점을 맞춘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인후는 젊어서는 학문을 연마하는 데 치중했을 것이기 때문에 화평하면서도 호방한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30대 중반에 겪은 두 임금의 연이은 죽음은 김인후 개인으로서 큰 충격이었고 아픔이었기 때문에 고명하고 순정한 중에도 가끔은 비분강개의 뜻을 시에 나타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서는 동방 18인분 중 한분이다. 1796년 정조는 하서를 문묘에 배향하면서 동방의 주자요 호남의 공자라고 칭송했다. 성명 음양의 심오한 뜻을 열어준 공은 태극도를 지은 송나라의 주염계와 같고, 굳세고 곧은 마음은 엄동설한의 송백과 같으며 광명하고 따스함은 맑은 물위의 연꽃과 같아서 그 넉넉한 인품이 호남의 공자와 같다고 했다.
정조의 평가는 “하서의 출처의 바름은 견줄 자가 없다”고 한 율곡 이이의 평가와 “도학과 절의 문장을 겸한 이가 거의 없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 선생을 낳으셔서 이 3가지를 겸하게 하였다”는 우암 송시열의 평가를 근거로 한 것이다.
하서의 도학은 훌륭한 스승과 친구를 만난 것과 진리에 대한 깊은 열정과 탐구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모재 김안국으로부터 수학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신재 최산두로부터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정신을 이어 받았으며, 제자였던 인종으로부터 ‘주자대전’을 전해 받아 평생 학문의 목표를 삼았다.
김인후는 순창의 점암촌과 장성의 맥동에서 도학의 완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은 소학의 실천, 대학의 경세를 거쳐 중용의 천명도에서 완성됐다. 그의 도학은 이기를 분변하면서 감정의 기미를 살펴 중화의 경지를 실현하는데 있다.
하서의 도학은 퇴계와 함께 쌍벽을 이룰 정도로 당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서경덕의 학문이 하학을 소홀히 하고 돈오로 이끌 우려가 있다고 했으며, 고봉과 일재에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 아니라는 견해를 제시해 퇴계와 고봉, 율공의 성리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서의 도학은 그의 절의와 함께 혼탁한 세상의 사표로서 영원한 스승이었다.
정리=이경재 기자 ilyo66@ilyo.co.kr
사진=장성군/이경재 기자 ilyo6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