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당분간 문재인식 스타일은 계속될 전망이다. 정국 안정을 위한 ‘통 큰 결단’과 예정된 결과인 ‘친문(친문재인) 리더십’ 사이에 걸친 행보다. 야권이 극렬하게 반대한 강경화 구하기에서 문재인 스타일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등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의 ‘강경화·김상조 일병 구하기’에서 드러난 함수관계를 보면 그 이유가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일자리 추경 예산 편성 협력을 당부하며 취임 후 첫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후퇴는 없었다.”
내각 1기 출범에서 나타난 문 대통령 행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야권의 대여투쟁 기조에 흔들림 없이 ‘마이웨이’를 택했다. 문 대통령은 6월 13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임명동의안 채택이 불발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에 이어 야권이 낙마 1순위로 지목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임명 수순을 밟았다. 야권은 “협치를 발로 걷어찼다”며 강경 투쟁을 예고했지만, 문 대통령은 마이웨이를 택했다. 다만 이전 정부의 ‘야권 전면 배제’가 아닌 국회 소통 스탠스를 최대한 취했다. 헌정 사상 첫 추가경정예산 편성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은 게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갈등의 본질인 인사 문제는 비껴갔다. 실제 문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한 6월 12일 오전 국회에서는 ‘선 문 대통령 유감-후 국민의당 협조’를 골자로 하는 강경화 일병 구하기 성공 시나리오가 돌았다. 문 대통령이 5대 비리 배제 원칙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유감을 표시하면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의당이 전향적 협조로 선회, 꽉 막힌 인사 정국을 풀 단초를 제공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하나의 설에 불과했다. 문 대통령은 시정연설에 앞서 가진 정세균 국회의장과 여야 지도부 간 차담회에서 인사 문제에 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문 대통령이 국회가 아닌 대국민 지지를 등에 업고 드라이브를 건 셈이다. 일각에선 문재인 정부가 ‘파비우스’(fabian strategy) 전략을 쓰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직접적인 싸움을 피하되, 지연 전략을 통한 소모전으로 반대편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일컫는다. 청와대 관계자는 “시정연설의 목적은 추경”이라며 “(인사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본질을 흐릴 수 있다”고 했지만, 시나리오의 한 축인 국민의당에서조차 “협치가 의심된다”는 비판이 나왔다.
김동철 원내대표는 비공개 회동에서도 문 대통령이 인사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하며 “형식(시정연설 등 소통행보)은 바뀌었는데, 내용(청와대의 일방적 요구)은 바뀐 게 없다”고 꼬집었다. 같은 당 박지원 전 대표는 “협치의 큰 그림 없이 ‘내가 잘하고 있으니 나를 따르라’는 드라마식 PD 정치로는 실패할 것”이라고 힐난했다. 자유한국당은 아예 시정연설 전 차담회에 불참했다. 정우택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결자해지가 필요하다”고 문 대통령을 압박했다. 주호영 바른정당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도 문 대통령이 시정연설 하루 앞두고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등을 비롯한 장·차관 인사를 단행한 데 대해 “장관은 보은 인사, 차관은 코드 인사”라고 맹비난했다.
그런데도 당·청 내부에선 자신감이 엿보인다. 여당 한 의원은 “우리가 야권일 때 했던 강경모드보다는 톤다운 아니냐. 야권의 비판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민주당이 야당이었으면, 1∼2명은 낙마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만큼 정국 주도권 확보에 자신감이 넘친다는 얘기다. 그 근저에는 외치와 내치의 상관관계가 깔렸다. 당·청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6월 28일부터 나흘간 진행되는 한·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7∼8월 한·중 정상회담 등 외교 시즌에서 빅이벤트를 준비 중이다.
문 대통령은 6월 2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을 한다. 외치가 내치를 덮을 가능성이 큰 셈이다. 문 대통령이 정면 돌파를 택한 첫 번째 이유다. 이미 문 대통령은 6월 12일 청와대에서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2030년 동북아 월드컵 개최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정치권 안팎에선 문재인 발 외교 빅이벤트의 신호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6월 1일 미국을 다녀온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 날짜를 조율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문재인 정부 1년차 하반기는 ‘외교 정국’으로 급속히 쏠릴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정치권 안팎에선 트럼프 대통령 방한이 올해 11월 이전으로 앞당겨지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그간 외교가 안팎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일본 방문에 맞춰 방한할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일본보다 앞서 방한할 경우 동북아 주도권은 물론, 한미 동맹 재확인을 통해 국내 보수진영 반발도 무마할 수 있다. 문재인 발 외교 빅이벤트가 국정 안정을 위한 내·외치의 최적화된 카드라는 얘기다. 때맞춰 토머스 섀넌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은 2박3일 일정으로 6월 13일 방한, 임성남 외교부 1차관과 면담하고 한·미 정상회담 일정 및 의제 등을 논의했다. 문 대통령의 외교 빅이벤트에서 ‘강경화 임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핵심이다. 또한 정부는 하반기 때 미국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 등과 사업에 속도를 내 유라시아 철도망 건설 등에 전력을 다할 방침이다. 외치를 내치에 활용하는 전술이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자신감에는 문 대통령의 높은 지지도와 지리멸렬한 야권의 상황도 한몫을 한다. 문 대통령이 ‘강경화·김상조 일병 구하기’에 나선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유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의 6월 9일(7일∼8일간 전국 성인 1011명 대상,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p,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대통령 국정수행 조사에서 문 대통령은 82%를 기록했다. 부정평가는 10%에 불과했다. 광주·전라 94%를 비롯해 서울 78%, 인천·경기 85% 등은 물론, 대구·경북(TK) 75%와 부산·울산·경남(PK) 81% 등 보수 텃밭에서도 높은 지지도를 기록했다.
정당 지지도는 민주당 48%를 제외하고 한국당 10%, 국민의당 8%, 바른정당·정의당 7% 순이었다. 민주당을 제외한 범야권이 사실상 공멸 상태에 처한 셈이다. 이 중 보수정당인 한국당과 바른정당 지지도 합은 17%에 불과하다. ‘포스트 대선’ 레이스에 돌입한 한국당은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의 등판을 놓고 친박(친박근혜)계와 초·재선 그룹이 사생결단 투쟁에 돌입했다. 한때 대안으로 떠오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끝내 불출마하기로 결정했다. 바른정당은 사실상 ‘김무성·유승민’ 투톱이 빠진 가운데, 이혜훈·김영우·하태경 의원 등이 나서면서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했다. 포스트 대선의 방향타를 장기간 잡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치권 한 분석가는 이와 관련해 “집권 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등 외교 문제가 최대 난제인 현 정부의 주요 4대 요직은 외교부 장관과 함께 검찰과 군 개혁의 선봉장인 국방부 장관,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이라며 “문 대통령이 강경화 임명을 포기한다면, 4대 요직이 모두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으로선 ‘강경화 임명’은 포기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카드라는 의미다.
마지막 이유는 지방선거 발 정계개편이다. 민주당과 국민의당 내부에선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호남 적자 경쟁을 둘러싼 정계개편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한다. 국민의당 지지도가 현재와 같이 한 자릿수에 머무른다면, 호남 지역 기초자치단체 의원을 시작으로, 현역 국회의원들이 이탈을 감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친문계 일부에서도 국민의당과의 통합 및 소연정에 긍정적이다.
국민의당 호남 대표격인 박지원 전 대표도연일 ‘문모닝’과 ‘문쌩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지방선거 발 정계개편을 염두에 둔 큰 그림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민주당 주류 의원은 “인위적인 정계개편은 역풍을 맞을 것”이라면서도 “이 흐름이 지속한다면, 민주당이 정계개편 주도권을 잡지 않겠느냐. 지방선거 전 정계개편은 문 대통령의 초반 국정운영과 마찬가지로, 정치권이 아닌 국민이 방향타를 결정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