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지난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 중 하나는 ‘성소수자 인권’이었습니다. 성소수자 인권 문제가 대선판에서 이렇게 쟁점이 된 것은 아마도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선 후보자들 간의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격론이 오갔고, 후보자들의 관련 발언은 연일 화제가 됐습니다. 대선에서 쟁점이 된 성소수자 인권 문제 논의는 정계를 넘어 사회 각계에 쭉쭉 뻗어 나갔습니다. 소수자 인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높아졌고, 그에 대한 의견 표출도 다양해졌습니다.
이에 다음 달 열리는 ‘퀴어문화축제’가 성소수자 인권 운동 ‘빅뱅 대폭발’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 홍준표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대선 중 ‘성소수자 인권’이라는 이슈를 처음 쏘아 올린 것은 놀랍게도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입니다. 그는 지난 4월 25일 열린 대선후보 4차 토론회에서 당시 유력 후보였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집중 견제하며 ‘군 내 동성애’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결혼(동성혼)도 반대하고 다 반대한다. 동성애를 엄벌하겠다”고 주장한 홍 후보는 토론 중 문 후보에게 “군 동성애 문제는 군의 사기 저하를 일으키고 심각하다. 동성애를 반대하느냐. 박원순 시장은 시청 앞에서 동성애 파티(퀴어 축제)도 하는데”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문재인 당시 후보는 “서울 광장을 사용하는 것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다. 차별을 금지하는 것과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같느냐”며 “(동성애) 합법화에 찬성하지 않는다”라고 답했습니다.
홍 후보는 이날 토론을 마친 뒤 문 대통령의 답변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습니다. 그는 “(문 후보자가 토론에서는)반대한다고 했는데 원래 차별금지법을 내면서 민주당에서는 동성애를 합법화시킨다고 했다. 반대한다고 하길래 뜻밖이다 싶어서 두 번 더 물어봤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홍 후보는 동성애 질문을 통해 문 대통령의 탄탄했던 지지를 흔드는 것에는 성공했습니다. 이른바 ‘흔들기’ 전략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죠.
본인의 ‘돼지 발정제’ 논란을 어느 정도 가라앉게 하기도 했구요. 일각에서는 문 후보가 홍 후보의 ‘덫’에 걸렸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토론이 끝나고 동성애를 부정한 문 대통령의 답변에 성소수자 단체는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냐”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기습 시위를 벌인 성소수자 인권단체의 한 회원이 기자회견을 하던 문 대통령에게 무지개 깃발을 들고 다가가 항의 의사를 표시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죠.
이에 문 대통령은 논란이 된 발언에 대해 사과하며 “동성애는 허용을 하고, 말고 하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각자의 지향과 사생활에 속하는 문제다. 다만 군대 내 동성애 허용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말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동성애로 인해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만큼은 확고하다. 우리 사회가 공론을 모으고 사회적 합의를 모아나가야 가능한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이전부터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성소수자 문제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던 정의당과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대선 이후 더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요.
지난 11일에는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6대 약속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심 대표는 대선 후보 토론 중 벌어진 두 후보자 간의 동성애 찬반 논쟁에서 1분 찬스까지 사용하며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소신 발언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었죠.
# 대학가에서 ‘퀴어’ 고백 튀어 오른 까닭은?
이렇게 대선판에서 달궈진 성소수자 이슈는 대선이 끝난 후 더욱 달궈지고 있는 모양샙니다.
특히 최근 성소수자 인권 이슈는 대학가로 번졌습니다. 대선 후보자들이 보였던 다소 실망스러운 인식에 대학생들이 직접 목소리를 낸 것인데요. 대학가에서는 성소수자들의 익명 고백이 줄을 이었습니다. 대자보나 SNS 익명 게시물을 통해 자신의 연인에게 편지를 쓰거나, 동성애 혐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 것이죠.
사진 출처= ‘정대후문 게시판’ 페이스북 페이지.
첫 번째 목소리는 홍 후보와 문 대통령이 TV토론에서 ‘동성애’와 관련 발언을 했던 그다음 날인 지난 4월 26일 나왔습니다. 고려대 게시판에는 “나는 존재를 부정당했다. 사람들은 나의 존재를 놓고 찬반 토론했다. 나는 누군가 싫어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것이 돼버렸다. 나는 단지 사랑하고 싶었다”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같은 날 고려대에서는 ‘성과 사회’ 수업 중간고사 문제가 대자보로 붙기도 했습니다.
대자보에는 “한 대통령 후보가 ‘동성애와 동성혼에 반대하지만, 차별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 같은 주장은 어떤 점에서 모순이 있는가?”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전날 있었던 토론에서 문 대통령의 동성애 관련 발언을 저격한 것이죠.
사진 출처= ‘정대후문 게시판’ 페이스북 페이지.
이를 시작으로 서울대, 한양대 등 서울권 여러 대학에서는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힌 대자보와 SNS 게시글이 올라왔습니다. 특히 온라인 익명 게시판인 ‘대나무숲’에서는 자신의 동성 연인에게 마음을 전하는 글들이 올라와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좋아해 마지않는 너에게’라는 제목으로 고려대학교에 붙은 대자보는 학내 커뮤니티로 공유되며 화제가 됐는데요. 작성자는 자신을 ‘남자친구’라고 밝히며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절절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많은 이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은 해당 대자보는 영상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사진 출처= ‘정대후문 게시판’ 페이스북 페이지.
“존재의 부정이라고 하면 무겁고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나로서 살 수 없음이라 함은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에 네 이름을 태그하려다가 친구들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예쁘게 나온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릴 수 없는 것이며, 네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닌 일에 서로 미안해하게 되는 것이다.”
“자꾸만 나를 지우려는 이 사화에서 내 사랑은 사랑으로 취급받지 못하니까, 내 사랑이 널 힘들게 할까 봐, 나는 함부로 사랑을 속삭일 수 없다. 이 글을 네게 바친다.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너에게. 아니, 사랑해 마지않는 너에게”
# 대선, 국회, 캠퍼스…그다음은 사회로! ‘퀴어문화축제’
대선에서의 성소수자 인권 이슈 논의는 앞서 화두가 됐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출범, 군 내 동성애자 군인 색출 및 처벌 사건인 일명 ‘A 대위 사건’ 등과 함께 국회에 무지개를 띄웠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차별금지법 추진이 이뤄졌고, 군형법일부개정안 발의 또한 시도됐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 인권단체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의 한 관계자는 “최근 군형법일부개정안 관련해 입법 발의를 하고 있고, 대선 직전 있었던 ‘A대위 사건’ 관련해 대응도 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위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또한 재출범됐다. 대선 전후로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해 여러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두 법안은 지난 10년간 논의되며 발의가 시도됐으나 일부 보수기독교계 등의 극심한 반대 여론으로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성소수자 이슈가 많은 국민에게 알려지며 관심을 받는 지금, 여전히 희망은 남아있습니다. 관련 법안 제정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지지까지 기대해볼 수 있기 때문이죠.
과거 ‘그들만의 축제’로 불렸던 ‘퀴어문화축제’는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모여 매년 그 규모가 커지고 있습니다. 퀴어문화축제는 지난 2000년 시작돼 올해 18회째를 맞았는데요. 최근 이슈가 된 만큼 올해 축제는 예년보다 참여자가 더욱 늘어날 전망입니다. 게다가 다음 달 열리는 퀴어문화축제에서는 축제 사상 최초로 ‘국가인권위원회’의 부스가 들어설 예정이라는데요.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지난 2013년 홍대에서 열린 축제 이후로 참가자들이 많이 늘었고, 관심도 증가했다. 2014년 신촌에서 축제를 열었을 때는 반대 단체가 퍼레이드 중간에 길을 막으며 이슈가 많이 돼 그다음 해 참가자가 더욱 늘어나기도 했다“라며 ”올해에도 성소수자 관련 여러 이슈가 많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많다. 지난해 3~4만 명 기준으로 그 이상이 참여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성소수자 문화 행사라고 해서 성소수자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족·친구 단위로 오시는 분들도 많다. 점점 일반 시민들의 참여도 늘고 있고, 인권단체도 많이 참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열린 퀴어문화축제에서는 축제 반대 시위자가 퍼레이드 행진 대오에서 함께 걸으며 화합하는 모습도 보여줬는데요. 시위자는 “하나님 앞에 동성애는 죄악 중의 죄악이다. 심판받고 지옥간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서도 축제 참가자들의 제안으로 퍼레이드에 합류해 약 2분가량 함께 행진했습니다.
그는 다른 참가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어깨동무를 하거나 포옹을 하기도 했는데요. 당시의 모습이 찍힌 사진과 동영상은 ‘올해 퀴어 퍼레이드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다음 달 열리는 ‘퀴어문화축제‘...또 어떤 이슈와 메시지가 이 사회로 나오게 될까요.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