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 기록화. 사진출처=청남대 홈페이지
세종시청 청사 앞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친필 표지석이 있다. 2015년 세종시청 개청식을 기념해 박 전 대통령이 선물한 친필 휘호를 그대로 새겨 넣은 표지석이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탄핵과 구속으로 표지석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4월 4일 세종시 38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세종행동본부는 박 전 대통령 친필 표지석 앞에서 “중대 범죄자 박근혜의 친필 표지석은 적폐청산의 상징물이다. 즉각 철거해야 한다. 파면에 이어 구속영장까지 발부된 대통령이다. 구체적 범죄행위가 드러나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의 친필을 거대한 돌판에 새겨 기념하는 것은 세종시민들의 수치다”라고 밝혔다. 세종행동본부는 철거를 요구하는 구호문구와 노란 리본 스티커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두 달이 흘렀지만 세종시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춘희 시장은 “표지석 철거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기 때문에 시장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기 어렵다”라는 입장이다. 세종시 관계자는 “들어온 민원을 살펴보면 ‘철거하자’는 입장과 ‘역사이기 때문에 그대로 둬서 사람들이 깨우치게 해야 한다’라는 의견이 팽팽하다. 괜히 표지석 때문에 의견이 갈리고 세종시가 내부적으로 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라며 우려를 드러냈다.
하지만 세종민주평화연대 이혜선 집행위원장은 “세종시가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세종시 내에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을 의식해서 눈치를 보고 있는 셈이다. 친필 표지석은 역사가 아니다. 국정농단을 저지른 대통령 표지석을 세종시청이라는 상징정인 공간에 그대로 두는 것은 세종시민으로서 용납이 안 된다”라고 성토했다.
세종시엔 또 하나의 ‘박근혜 흔적’이 남아 있다. 2016년 1월 24일 대통령기록관이 경기 성남시에서 세종시로 이전할 때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친필 휘호를 선물했다. 대통령기록관은 친필 휘호를 바위에 새겨 넣은 표지석을 청사 주변에 설치했다. 세종행동본부는 지난해 탄핵 정국 이후부터 “박 전 대통령 표지석을 철거해야 한다. 대통령기록관 측의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망발이다. 박 전 대통령 표지석은 기록으로 남겨야 할 유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해왔다.
대통령기록관 입장은 단호하다. 대통령기록관 관계자는 “표지석은 하나의 기록이자 또 하나의 상징물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 생긴 것도 아니다. 청사를 개관하면서 기념으로 표지석을 세웠는데 굳이 철거해야 할 이유는 없다. 박 전 대통령이 나중에 사법적인 단죄를 받더라도 철거 계획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표지석도 전국에 많은데 전부 철거해야 하나”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세종행동본부는 “표지석은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된 적이 없다”라고 반박했다.
표지석을 둘러싼 갈등은 진영 대결로 번질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박근혜 흔적 지우기’에 반발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 팬클럽인 박사모 관계자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들의 측근들은 잘못한 것이 드러났는데도 면죄부를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재판 중이고 역사가 재평가할 가능성도 있다. 잘못이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표지석을 철거해서는 안 된다. 보수가 분열해서 힘이 없으니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청남대는 ‘남쪽에 있는 청와대’라는 의미로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는 대통령 전용 별장이다. 청남대 대통령 광장에는 기념사업회와 조율이 끝나지 않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대통령들의 동상이 실물크기로 설치돼 있다.
청남대는 최근 대통령 광장에 전직 대통령 예우를 위해 박 전 대통령 동상 설치에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청남대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도 전직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검토하고 있다. 기념사업회가 결성되면 동상 제작과 관련해 협의에 들어가겠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충북 지역 시민단체들 사이에선 “불명예스럽게 탄핵당한 대통령을 동상으로 만들어 기리는 것은 혈세 낭비다”라는 비판이 나온다.
대통령 기록화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청남대는 2015년 준공한 대통령 기념관 1층에 역대 대통령들의 역사 기록화를 2점씩 전시하고 있다. 농부에게 막걸리를 따르는 장면(박정희), 등산(김영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김대중), 이라크 파병장병을 끌어안는 장면(노무현) 등이다. 기록화는 서양화 300호(300×200) 크기로, 점당 5000만 원씩 총 1억 원의 예산이 든다.
청남대가 박 전 대통령 기록화 설치를 앞두고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일각에서 “탄핵 대통령을 기념할 필요가 없다”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청남대 관계자는 “기록화는 생애와 업적 두 부분으로 나눠서 2점씩 걸려있다. 예산은 대통령마다 1억이 들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기록화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을 위해 기록화 관련 예산은 당연히 세울 수 없다”라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 동상과 달리 당장 예산 검토가 필요한 기록화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친 셈이다.
‘박근혜길’도 골칫거리다. 청남대는 2008년부터 역대 대통령 이름을 딴 산책길을 조성해왔다. 전두환(1.5㎞)·노태우(2㎞)·김영삼(1㎞)·김대중(2.5㎞)·노무현(1㎞)·이명박(3.1㎞) 전 대통령길 등 6개 구간이다. 최근 부정적인 여론에 부담을 느낀 청남대가 박근혜길 조성을 포기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청남대 관계자는 “일단 검토는 안 하고 있지만 박근혜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라고 밝혔다.
국가기관과 지자체 대부분이 ‘박근혜 흔적 지우기’ 여론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지자체도 있다. 충북 증평군은 박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 통과한 즉시 현관로비에 설치된 도정소식 게시판의 박 전 대통령 기념사진을 떼어냈다. 증평군 관계자는 “민원이 들어온 것은 아니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는데 ‘사진을 그대로 두기는 좀 그렇지 않느냐’라는 의견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진으로 교체했다”라고 설명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