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 참석해 있다. 장 실장은 그동안 수차례 사내유보금을 연구개발 및 일자리 늘리기에 써야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자신의 저서 ‘한국자본주의’를 통해선 ‘초과 내부유보세’ 도입을 주창하는 등 사내유보금 과세에 적극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일요신문DB
재계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일자리 강공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배경에는 기업들의 천문학적인 사내유보금이 있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3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700조 원에 육박한다. 이는 정부 1년 예산인 400조 원의 2배 가까운 금액이다.
재계 서열 1, 2위인 삼성그룹(삼성)과 현대자동차그룹(현대차)이 보유한 사내유보금의 합은 340조 원이 넘는다. 이 가운데 현대차는 최근 5년 사이 사내유보금 증가율이 55%에 달해 42%를 기록한 삼성을 앞질렀다. 삼성은 2012년 말보다 65조 원이 증가한 219조 5000억 원을, 현대차는 같은 기간 43조 4000억 원이 는 121조 7000억 원을 유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SK그룹(SK)의 사내유보금은 70조 6000억 원으로 30대 기업 가운데 가장 높은 증가율(66%)을 보였고, 뒤를 이어 LG가 48조 8000억 원을 유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LG는 696%의 유보율로 삼성(3518%), 현대차(1976%), SK(1285%)에 비해 유보 정도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유보금을 납입자본금으로 나눈 값을 가리키는 유보율은 기업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자금력을 나타내는 지표다. 롯데와 포스코는 4대 기업보다 사내유보금 총액은 작지만 유보율이 각각 4068%, 3881%로 삼성보다 더 강한 유보 성향을 드러냈다. 30대 기업 평균 유보율은 1224%다.
자본잉여금과 이익잉여금을 합친 값을 일컫는 사내유보금은 기업이 영업활동으로 거둔 순이익 가운데 세금과 주주 배당을 빼고 남은 자금을 뜻한다. 사내유보금이 늘수록 주주가 받는 배당이 줄고, 직원의 임금 상승률 또한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2013년 1분기 기준 5만 8623명이던 현대자동차 정규직 직원은 올 1분기 6만 4640명으로 10%가량 늘었다. 또 같은 기간 급여총액은 1조 300억 원에서 1조 2800억 원으로 20%가량 늘었다. 그러나 사내유보금 증가율인 55%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또 현대차의 배당성향은 2014년 11%에서 2015년 19%로 증가했지만 글로벌 자동차 기업 평균 수준인 25~30%에는 미치지 못했다. 즉 현대차는 주주 이익보다 기업 이익을 우선순위에 놓고 경영 활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차는 “이익잉여금 등을 활용해 해외 생산 설비 등에 투자했으므로 재무제표에 드러난 유보금 증가는 당연하다”고 해명한다. 인도, 멕시코 등 해외 공장을 증설하는 과정에 사내유보금이 사용됐다는 것이다. 또 초기 투자비용이 다른 산업보다 많은 자동차산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사내유보금 증가는 오히려 투자가 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재계 관계자는 “사내유보금이란 표현부터 잘못됐다”며 “일부 시민단체가 사내유보금이란 말을 쓰면서 마치 금고에 돈을 쌓아두고 있는 것처럼 호도하지만 정확하게는 공장 설비, 생산물 등에 투입돼 (사내유보금은) 현금화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 사내유보금이 모두 현금으로 축적돼 있는 것은 아니다. 단기금융상품, 토지, 건물, 생산설비, 주식 등의 형태로도 존재한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대비해 현금을 늘리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대량 리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상품 제조 회사에 현금이 없다면 재정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임준선 기자
단 올 1분기 삼성전자의 단기금융상품은 21조 5700억 원으로 직전 결산 때와 비교해 8조 6000억 원이 감소했는데 이는 삼성전자가 자기 주식을 대량 매입해 소각한 결과로 풀이된다.
최근 삼성은 주주가치 제고를 이유로 삼성전자 주식(보통주) 90만 주를 매입해 소각했고, 보유 중인 자사주 1883만 주도 순차적으로 소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사내유보금을 활용한 자사주 소각은 결과적으로 대주주의 지분율을 높임으로써 오너 일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소액 주주도 발행주식 감소에 따른 주가 상승과 높은 배당을 기대할 수 있는 덕에 시장에선 ‘상생의 한 예’로 꼽힌다. 삼성 측은 “M&A 등 대규모 거래나 우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재원으로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최근 재무 상황이 안정돼 보유 자사주를 소각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주주와 함께 기업 활동의 한 축을 담당하는 노동자는 자사주 소각을 통해 얻는 이득이 사실상 전무하다. 삼성전자의 연결기준 이익잉여금은 2013년 말 148조 원, 2014년 말 169조 원, 2015년 말 185조 원, 2016년 말 193조 원까지 급증했지만 삼성전자의 정규직 직원은 2014년 3월 기준 9만 6372명에서 올 1분기 9만 3598명으로 감소했다. 급여총액 또한 같은 기간 2조 200억 원에서 1조 9000억 원으로 줄었다. 즉 기업의 이익 확대가 일자리 증가로 이어지지 않은 셈이다.
대신 삼성은 사내유보금을 활용한 자산 취득 규모를 늘렸다. 2013년 연결기준 75조 원이던 유형자산은 올 1분기 95조 원으로 수직 상승했다. 사내유보금을 측정하는 또 다른 지표인 재고자산도 같은 기간 19조 1000억 원에서 21조 8000억 원으로 증가했다.
현대자동차가 매입한 옛 한전 부지 전경. 우태윤 기자
현대차는 다른 대기업과 비교해 주식 형태의 사내유보금을 대량 소유하고 있다. 현대차는 현대모비스→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를 가진 탓에 필연적으로 내부 지분 확보를 통한 지배구조 강화를 꾀할 수밖에 없다. 실제 ‘공동기업 및 관계기업 투자’ 명목으로 현대차가 보유한 자금은 올 1분기 기준 17조 8000억 원에 달한다.
이는 기업 지배를 목적으로 한 지주사 SK(주)가 보유한 관계기업 주식 총액인 11조 7800억 원은 물론 또 다른 지주사 LG(주)가 보유한 주식 총액 11조 3700억 원보다 많은 액수다. 지주회사 전환을 미루는 한 현대차는 이처럼 계열사 지분 확보를 위해 사내유보금의 상당액을 현금으로 보유하거나 주식 투자에 활용할 수밖에 없다. 순환출자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 삼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대차는 올 1분기 연결 기준 64조 8700억 원의 이익잉여금과 4조 2000억 원의 자본잉여금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아동차는 23조 7900억 원의 이익잉여금과 1조 5600억 원의 자본잉여금을, 현대모비스는 27조 9400억 원의 이익잉여금과 1조 4000억 원의 자본잉여금을 적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돈의 세부 활용 방안은 정확히 공개되지 않는다. 삼성 등 다른 대기업의 사내유보금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정치권은 “사내유보금이 부가가치 창출과 무관한 부동산 투자 등에 쓰이고, 총수 일가의 사익을 도울 우려가 있다”고 주장한다.
기아차의 현금과 현금성 자산은 최근 3년간 3배 이상 증가했다. 2015년 1조 1000억 원이던 현금성자산은 올 1분기 기준 3조 4300억 원까지 늘었다. 단기금융상품도 2조 8700억 원에서 4조 1300억 원으로 증가했다. 이들 계열사가 늘린 현금은 시설설비 투자에 쓰이기도 하지만 지배구조 개선에 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대차 관계자는 “지배구조 개선 문제를 논하기에 시기상조며 자사주 매입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삼성 역시 “자사주 매입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자사주 매입이 투자 활동으로 분류돼 세제 혜택을 받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정부는 ‘기업환류소득세제’를 운영하며 사내유보금에 과세하고 있지만 투자 활동으로 인정되는 자사주 매입, 부동산 취득 등은 과세 대상에서 제외하는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들어 기업환류소득세제를 수정·강화한다는 방침이 마련되면서 삼성과 현대차를 비롯해 SK 등 대기업의 고민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1년 사이 SK㈜가 보유한 현금은 1조 5000억 원이 늘었는데 이는 정부가 지주사 요건 강화를 예고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문재인 정부 대표 경제 브레인인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시민단체 대표 시절 대기업의 과도한 사내유보금과 불투명한 사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밝혀왔다. 과거 현대차가 10조 원을 투입한 한전 부지 매입에 대해 공개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 설계자로 꼽히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또한 수차례 사내유보금을 연구개발 및 일자리 늘리기에 써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자신의 저서 <한국자본주의>를 통해선 ‘초과 내부유보세’ 도입을 주창하는 등 사내유보금 과세에 적극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또 앞서 문재인 정부가 재벌 개혁 대상으로 ‘4대 기업’을 지목한 바 있기 때문에 사내유보금 과세 정책은 이들 기업 현황을 토대로 만들어질 공산이 크다. 최대한 이익을 유보하려는 기업과 이익을 나누려는 정부, 사내유보금 해법은 문재인 정부 ‘재벌 개혁’ 의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
현대차 내우외환…안에선 승계 문제, 밖에선 품질 문제 ‘끙~’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사진제공=현대자동차 현대차그룹의 당면한 과제는 차량 23만 대에 대한 리콜 조치다. 앞서 국토교통부는 제네시스와 에쿠스 등 12개 차종에서 5건의 차량 결함을 발견하고 자발적인 리콜을 권고했지만 현대차는 이에 불복했다. 국토교통부는 다시 차량 결함에 대한 청문을 실시하고, 지난 5월 12일 강제 리콜 처분을 확정했다. 이미 북미 시장에서 차량 60만 대에 대한 리콜 명령을 받은 현대차는 이번 정부 조치로 제품 신뢰도에 타격을 입게 됐다. 그룹 안팎에선 개혁적인 성향의 정권 출범에 발맞춰 “선제적인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힘을 받고 있다. 현대차의 지배구조는 현대모비스→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다. 그간 순환출자는 기업 오너가 적은 지분으로 각 계열사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악용돼 왔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아왔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모두 순환출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라 현대차가 받는 압박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차는 순환출자 문제와 관련해 아직까지는 별다른 해소 방안을 내놓지 않는다. 몇몇 언론에서 보도된 ‘지주회사 전환 추진설’을 공개 부인하는 등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에 대한 경영권 승계 작업은 사실상 ‘올스톱’된 상황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경영권 승계를 미룰 수만은 없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올해 나이 80세로 고령이다. 재계 안팎에선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선 작업이 뒤로 밀리면 더 큰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재계 서열 1~5위권 기업에 대한 수사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으며, 국세청의 현대차 세무조사 또한 임박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또 문재인 정부는 ‘4대 재벌’ 개혁을 공약하면서 현대차 계열사인 현대글로비스의 일감 몰아주기 등을 공개 비판했다. 김상조 위원장은 재벌 대기업을 집중 조사하는 ‘기업집단국’을 부활시켜 기업 내부거래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재벌 개혁 본보기로 현대차가 거론되는 것이 현대차로서는 부담스러울 것”이라며 “외부에선 품질 문제, 내부에선 지배구조 문제 등 그야말로 내우외환을 겪고 있는데 수년간 누적돼 온 ‘고름’이 하나둘 터지는 격이라 제대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위기가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