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6월 19일 김 아무개 씨(63)는 부산 동구 범일동의 현대백화점에서 320만 원을 주고 스위스산 시계 1점을 구입했다. 롤렉스에서 생산한 여성용 데이 저스트 69173 다이아몬드형 시계판 모델이었다. 현대백화점에서 발행하는 보증서까지 받아 든 김 씨는 이 시계를 지금까지 잘 써왔다.
현대백화점이 20년 전에 가품 롤렉스 시계를 판매하며 발행한 품질보증서.
김 씨는 최근 시계 안쪽 청소를 하고 싶은 마음에 부산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롤렉스 서비스 센터를 방문했다. 하지만 서비스 센터 쪽은 수리가 불가하다는 반응을 내놨다. 서비스 센터 관계자는 김 씨에게 “이 시계 제품 번호로 조회해 보니까 시계판이 다이아몬드가 없는 모델이다. 이 시계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다. 가품이다. 정품이 아니면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김 씨는 어이가 없었다. 백화점에서 구매한 시계이고 보증서까지 있는데 자신의 시계가 정품이 아니란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김 씨는 자신이 시계를 구매한 현대백화점을 찾았다. 현대백화점의 반응은 싸늘했다. 김 씨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만 했다. 김 씨가 제대로 된 조치를 요구하자 현대백화점은 “우리가 아는 시계수리점 가서 청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대답만 남겼다.
당시 현대백화점에서 가품이 판매될 수 있었던 건 유통 구조 때문이었다. 2002년 전에는 시계전문점이 백화점에 입점해 알음알음 수입한 상품을 위탁판매하는 형태로 유통됐다. 롤렉스는 지난 2002년 한국에 법인을 차리고 정식 유통을 시작했다.
3가지 형태 시계판을 가진 롤렉스 데이 저스트. 가운데 다이아몬드 판형이 가장 비싸다. 사진출처=롤렉스코리아
시계전문점 입장에서 부품 갈이는 짭짤한 장사였다. 눈금형이나 로마 숫자형 시계판 시계를 수입해서 다이아몬드판으로 교체 뒤 판매하면 20%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다. 게다가 눈금형이나 로마 숫자형 시계판은 챙겨뒀다가 재판매해도 이익이 됐다. 수리요청이 들어왔을 때 웃돈을 받고 챙겨 둔 시계판을 이용하면 또 다른 이익이 남았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롤렉스가 한국에 직접 진출하기 전에 백화점에서 내놨던 롤렉스는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부품 갈이가 된 뒤 판매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가품을 구매한 소비자가 정식 서비스를 받으려면 시계를 다시 정품으로 돌려놔야 한다. 한 고가 시계 서비스 센터 관계자는 “보통 디자인이 변형된 시계는 정품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허나 변형된 부분을 정품 부품으로 교체하면 정품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롤렉스 시계의 눈금형이나 로마 숫자형 시계판은 100만 원 수준이다. 다이아몬드형 시계판은 300만 원까지 간다. 게다가 분해비용은 일부 소모품 소재 값까지 합해서 60만 원이 추가로 든다. 김 씨의 경우 자신의 시계를 정품으로 되돌리는데 360만 원이 추가로 드는 꼴이다.
김 씨는 현대백화점에 자신이 구매했던 다이아몬드형으로 시계판 교환을 요구했다. 현대백화점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눈금형이나 로마 숫자형 시계판으로 바꿔줄 순 있다”며 원가절감식 고객서비스를 제안했다. 김 씨는 이를 거절하며 현대백화점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백화점을 찾는 것 아닌가? 시계야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싸게 살 수 있는 곳이 많았다”며 “가품을 판매했다는 점도 화가 나는데 대응책 가지고 거래하려고 드니 황당하다”고 했다.
이와 관련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진품이다. 임의로 개조한 상품이다. 롤렉스 코리아는 임의 개조된 상품에 고객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며 ”백화점 서비스 차원에서 눈금형이나 로마 숫자형 시계판으로 바꿔준다고 했는데 고객이 계속 다이아몬드형 시계판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솔직히 20년 전에 그 고객이 이런 사실을 알고 샀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20년 전 고객 이야기를 마냥 믿을 순 없다“고 말했다.
롤렉스가 한국 영업을 정식으로 시작하기 이전에 롤렉스 시계를 구입한 일부 소비자는 법적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한 소비자는 “이런 식으로 당한 소비자를 모으고 있다. 다 모이면 각 백화점에게 정식으로 조치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라며 “만약 백화점 쪽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단체 소송도 이어갈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현대백화점뿐만 아니라 롯데백화점에서 판매된 롤렉스 역시 비슷한 사례가 발견됐다. 지난 2001년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에서 롤렉스 시계 4개를 2400만 원 주고 구매한 한 아무개 씨의 시계 역시 이런 식으로 모두 가품 판정을 받았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