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프로야구의 인기가 한창인 요즘, 여러분에게 떠오르는 야구 명장면은 무엇이나요? 저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의 발판이 된 김재박 선수의 ‘개구리 번트’가 떠오르는데요. 영원한 숙적 일본과의 우승 결정전에서 김재박 선수는 완전히 빠지는 아웃카운트 공을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서 번트를 성공시켜 짜릿한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처럼 정교한 번트 한번이 때로는 호쾌한 홈런 한방보다 경기 흐름을 바꿔놓기도 야구사에 명장면으로 길이 남기도 하는데요. 야구 작전 중에서도 기교의 미학이 돋보이는 기술인 번트. <일요신문i>가 번트의 세계를 조명해봤습니다.
# 번트의 유래는 ‘작은새’?
번트란 배트를 휘두르지 않고 타자가 의식적으로 투수의 투구를 내야에 천천히 구르도록 갖다 대는 타격의 기술 중 하나입니다. 시원하게 터지는 안타는 아니지만 특정한 상황에선 이 번트만으로도 타자의 몫을 다해낼 수 있습니다. 뛰는 야구 기술로 유명한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번트 작전이 자주 보여지는데요. 쉬워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아주 까다로운 타격 기술입니다.
그럼 번트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번트의 역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세기에는 미국 야구에서는 페어 지역에 떨어진 타구가 파울 지역으로 흘러가도 ‘페어볼’로 인정했습니다. 당연히 타자들은 변칙적으로 이를 이용합니다. 미국 브루클린 애틀랜틱스의 디키 피어스 등이 3루선 쪽에 타구를 떨어뜨려 파울지역으로 흘러가게 하는 변칙적인 방법을 발달시켰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같은 방법이 장타를 칠 능력 없는 타자들이 부리는 잔재주일 뿐이라고 폄하했고, 작은 새를 뜻하는 ‘bunting’에 빗대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번트의 유력한 어원으로 알려져 있죠. 이밖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요. 방망이의 끝 부분인 ‘butt’에 공을 대던 것에서 번트가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고, 화물 열차를 살짝 밀어 궤도를 바꾸는 ‘bunting’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 내가 죽고 남은 선수는 살 수 있는 ‘희생플레이’
현대 야구에서 번트는 일종의 자살, 희생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누상의 주자를 불러들어야 할 때 감독은 번트를 지시하고 타자는 번트를 댑니다. 이 때문에 번트는 일반적으로 ‘희생 번트’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번트는 목적에 따라 대는 방법도 달라지는데요. 1루 주자를 2루에 보내는 번트는 1루 쪽으로 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1루수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병살 플레이를 방지하기 위해서죠. 오른손잡이 1루수일 경우 공을 잡아서 1루에 던지기 위해서는 한 번 몸을 트는 동작이 있어야 한다는 점도 이유입니다. 2루 주자를 3루에 보내기 위한 번트는 3루 쪽으로 대야 합니다. 3루수가 공을 잡게 함으로써 3루를 비워 2루 주자를 안전하게 진루시키기 위해서죠.
희생 번트 중 3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는 번트를 ‘자살 스퀴즈 플레이’라고 하는데요. 자살이라는 용어가 붙는 이유는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3루 주자가 홈을 향해 돌진하기 때문입니다. 타자가 공을 맞히지 못하면 3루 주자는 돌아갈 없이 포수에게 아웃되기도 하죠.
타자가 살기 위한 ‘기습 번트’ 기술인 세이프티 번트는 1루와의 거리가 가까운 왼손 타자들이 많이 사용합니다. 투수와 1루수 사이로 타구를 보내는 것이 정석이죠. 왼손 타자가 공을 긁어대듯이 번트를 댄다고 해서 ‘드래그 번트’라고도 합니다. 지난 22일 미국 메이저리그 텍사스 레인저스의 추신수 선수도 경기 중 ‘기습 번트’를 성공시켜 내야 안타를 만들어냈죠.
# 번트가 쉽다? 유혹적이지만 변수 많은 양날의 검
사실 번트를 성공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속 140km가 넘는 빠른 공에 번트를 대서 타구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만만치 않죠. 속도가 너무 빠르면 자칫 선행주자가 잡힐 수 있도 타구를 짧게 굴리면 포수가 잡아 역시 선행주자를 아웃시킬 수도 있습니다. 타구의 방향도 문제입니다. 선행주자가 다음 베이스로 무사히 안착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야 하고 또 방망이를 눕혀 양 손으로 잡고 빠른 공에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공에 대한 공포도 상당하죠.
또한, 번트에 대비한 수비수들의 움직임도 강화됐는데요. 번트를 대려고 하는 순간 1루수와 3루수가 눈앞에 나타나면 그 빈틈을 찾아 번트하기가 막막할 지경이죠. 여기에 압박감도 타자에겐 큰 부담입니다. 번트를 두 차례 실패해 투 스트라이크에 몰리고 나면 팬들은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는데요. 정작 번트를 대야 하는 선수들의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국내 프로야구 선수 중 번트하기 어려운 투수는 누가 있을까요? 대표적인 투수는 현재 재활 중인 기아 타이거즈의 윤석민 선수로 알려져 있는데요. 윤석민 선수는 번트 상황에서 거의 얼굴에 가까운 쪽으로 공을 던집니다. 워낙 강속구 투수인데다 몸 쪽으로 날아오는 투구에 반응했다가는 포수 플라이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빠르고 크게 휘는 슬라이더도 갖추고 있어 그 움직임에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죠.
#번트 명장면 뭐가 있나
우리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한 번트 명장면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앞서 언급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경기에서 나온 김재박 선수의 ‘개구리 번트’가 떠오를 텐데요. 당시 한국팀은 8회 말까지 2대 1로 일본에 뒤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 타석에 들어선 김재박 선수는 완전히 빠지는 아웃카운트 공을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 번트를 성공시켰죠.
사실 이 번트는 김재박 선수가 사인을 잘못 읽어 시도한 것인데요. 결과적으로 김재박 선수의 번트 성공으로 한국팀은 2대2 동점을 만들었고, 뒤이어 터진 한대화 선수의 결승 3점 홈런으로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극적인 번트는 언제 나왔을까요? 거포 레지 잭슨(Reggie Jackson)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그는 1967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21시즌 동안 통산 563개의 홈런과 1702개의 타점을 기록한 괴력의 타자입니다. 1977년 뉴욕 양키스 시절 LA 다저스를 상대로 한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무려 3연타석 홈런을 때려내 언론으로부터 ‘10월의 사나이(Mr. October)’란 애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레지 잭슨에겐 3연타석 홈런에 버금가는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것이 또 있는데요. 바로 1984년 9월 21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경기 레지 잭슨의 네 번째 타석입니다. 이날 세 번째 타석까지 삼진 2개를 포함, 3타수 무안타에 그친 레지 잭슨은 그의 네 번째 타석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는데요.
4대 4로 맞선 상황에서 레지 잭슨의 에인절스는 선두타자 브라이언 다우닝이 볼넷을 얻자 발 빠른 케리 페티스를 대주자로 기용합니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선 레지 잭슨. 일반적으로 희생 번트를 댄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당시 잭슨은 1973년 이후 단 한 개의 희생 번트를 시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텍사스 내야진은 번트가 아닌 강공에 대한 수비 시프트를 취했죠.
그러나 잭슨은 그 상황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희생번트를 갖다 댔고 정확히 투수와 2루수 사이에 번트를 성공시켰습니다. 무려 12년 만의 번트였죠. 이 번트로 그는 1루 주자를 안전하게 2루로 보내는 데 성공했고, 이어 터진 후속 타자의 안타로 에인절스는 결승점을 올리며 지구 1위인 캔자스시티와 0.5경기 차이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잭슨이 보여준 번트는 사람들에게 그간 500개 넘는 홈런을 때려내던 홈런 타자 레지 잭슨의 모습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부터 레지 잭슨의 기습 번트까지 야구 보는 맛을 더해주는 번트의 세계가 야구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금까지 홈런보다 아름다운 ‘번트의 미학’이었습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