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도시바 이사회가 한국과 미국·일본 연합을 반도체 사업 매각의 우선협상자로 선정했다. 사진=연합뉴스
도시바 이사회가 한·미·일 연합에 반도체 사업부 매각을 결정한 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법적구속력이 없는 단순 약속일 뿐”이라는 도시바 관계자의 말을 전하며 “협상 내용에 따라 연합의 틀이나 구성은 바뀔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 관민 펀드인 산업혁신기구(INCJ) 주축으로 일본 정책투자은행, SK하이닉스, 미국계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베인캐피탈 등이 참여한 다국적군에 변화나 계약 조건이 변경 등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일본 정부는 도시바 매각을 대만 홍하이에 팔린 샤프처럼 단순한 전자 회사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도시바는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의 전력·에너지·반도체 등 핵심 인프라 사업을 도맡아 온 회사다. 국가 안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에 중국계 기업에 매각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매각 작업 한걸음 한걸음에 신중을 기해왔다. 그러나 반도체 사업에 대규모 투자금이 소요되기 때문에 도시바를 인수해 감당할 만한 일본 기업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해외 기업으로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INCJ를 주축으로 해외 기업, 특히 미국 기업과 손잡고 인수를 추진하면 민간기업에 공적자금을 투입한다는 비판도 일부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며 금융기관과 대기업 도산에 공적자금을 수혈해줬다. 그러나 이들 기업이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걸쳐 결국 대거 도산하며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이다.
국가 안보와 관련된 기업의 해외 매각을 막으면서도 공적자금 투입을 최소화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인수 후보 3~4위권으로 밀린 SK하이닉스·베인캐피탈 연합이 미·일 연합에 손을 내민 것은 행운이었다.
최태원 SK 회장은 23일 도시바 반도체 인수와 관련해 “아직 안 끝났다”며 조심스런 입장을 취했다. 사진=고성준 기자
SK하이닉스는 미·일 연합이 도시바 반도체를 인수하기 위해 만드는 특수목적회사(SPC)에 3000억 엔(약 3조원)을 대출해줘 인수전에 뛰어들 계획이다. 일본 정부로서는 공적자금 투입 규모를 줄일 수 있게 된 셈이다. 또 공적자금 투입에 따른 부정적인 여론을 희석시킬 수 있는 카드이기도 하다.
문제는 SK하이닉스의 ‘대출’을 ‘인수’라고 볼 수 있느냐다. 도시바는 SK하이닉스가 반도체 회사이기 때문에 독점금지법 심사 통과를 위해 대출로 참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인수전에 강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웨스턴디지털(WD)가 이 문제를 걸고넘어질 경우 인수가 차일피일 미뤄질 수 있다.
NHK는 “정부가 이번 매각전을 주도하고 있어 절차상 투명성이 훼손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민간 기업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게 맞느냐는 의문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비판 속에 도시바는 한시가 급한 처지다.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부 매각이 지연돼 내년 3월 말까지 채무초과를 해소하지 못할 경우 도쿄거래소 상장이 폐지될 수 있어서다. 그 전까지는 반드시 매각을 완료해야 한다. WD가 소송전으로 시간을 끈다면 SK하이닉스가 한·미·일 연합에서 배제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 만약 인수에 성공하더라도 SK하이닉스가 도시바의 낸드플래시 메모리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느냐는 의문도 나온다. 단지 채권자 입장으로는 도시바 반도체의 경영에 개입하거나 기술 노하우에 접근하기는 어렵다. 일정 시간이 흐른 뒤 대출을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옵션이 붙어있는지도 불분명하다.
현시점에서 SK하이닉스와 도시바가 밝히기는 어려운 입장이지만, 기술력 유출을 우려하고 있는 일본 정부가 이런 옵션을 호락호락 받아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최태원 SK 회장이 23일 도시바 반도체 인수와 관련해 “아직 안 끝났다”며 조심스런 입장을 취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SK하이닉스가 도시바 반도체에 비지분 투자를 한 것을 봤을 때 이번 투자가 SK하이닉스의 경쟁력이나 수익성에 미치는 단기적인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도시바를 인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국책 펀드를 통해 낸드플래시 기술을 보호한 것”이라며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뺏긴 일본이 한국 기업과 기술을 공유할지는 미지수”라고 내다봤다.
김서광 저널리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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