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동경의 밤거리 | ||
소비·도시·문화를 연구하는 컬처스터디연구소 소장 미우라 아쓰시의 저서 <하류사회, 새로운 계급집단의 출현>이 출판되면서 일고 있는 현상이다. 계층 간 격차가 확대되면서 젊은이들이 하류인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게 요지다. 9월 중순 나온 이 책은 발매 2개월 반에 벌써 65만부가 팔려나갔다.
미우라가 말하는 하류는 단순히 생활이 어렵고, 소득이 낮은 계층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할 의욕도, 배우고 싶은 의욕도, 소비 의욕도, 의사소통 의욕도 없는 이른바 삶 자체에 의욕이 없는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계층을 총괄한다. 이들 상당수는 하류인생을 사는 데 전혀 개의치 않는다. 드러내놓고 하류인생이 행복하다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인터넷 공간에는 하류인생 사이트까지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1억 인구 모두가 중류라고 불렸던 일본에서 불고 있는 하류 열풍은 국민소득 2만달러, 전국민 중류사회 진입을 겨냥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 나는 ‘하류’가 좋다
요코하마에 사는 A군(32)은 매일 파칭코점으로 출근한다. 그곳에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파칭코나 슬롯머신을 하며 여기서 버는 돈으로 먹고사는 것이다.
오전 10시 파칭코점 문이 열리기 전부터 앞에서 줄을 선다. 입장한 뒤에는 밤 11시 문을 닫을 때까지 하루 종일 기계 앞에 앉아 있다. 점심은 맥도널드 등에서 파는 패스트 푸드. 돈을 따는 날이면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 귀가하기도 한다. 벌이는 월 20만엔 정도. 월세 6만엔에 식비 3만엔을 빼더라도 생활은 충분하다.
B군(27)은 출판사의 계약직 카메라맨이다. 사진 전문학교를 나온 뒤 여러 고민을 하다 현재의 직장을 선택했다. 연봉은 3백만엔 정도지만 쉬는 날이 많아 좋다. 취미는 사찰 탐방. 지난 여름에도 친구들과 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왔다. 연봉 1천만엔을 버는 친구도 있지만 ‘대단하다’는 것 외에는 큰 느낌은 없다고 한다. 하류인생 아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지금이 좋다”고 말한다.
미우라가 하류로 정의한 사람들은 야심이나 의욕이 낮은 젊은이들이다. 연령은 1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그러나 이들은 하류라는 표현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중류에 대한 애착도 없다. 부모의 집이 있고, 100엔숍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패스트푸드를 먹으면 굳이 직장인이 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다. 어른들은 “도대체 어떻게 할 셈이냐”고 소리를 높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게 편하다는 게 이유다.
▲ 스스로 ‘하류’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 세대들은 빠칭코 같은 도박이나 복권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 ||
미우라에 따르면 일본에 하류사회 태동의 조짐이 보인 것은 10여 년 전쯤 부터다. 거품 경제가 붕괴되면서 당시 졸업자들이 취업이 안돼 회사원 대열에서 탈락했고, 이들이 프리터(자립할 나이가 되었는 데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20~30대의 젊은이들을 일컫는 말)로 편입된 것이 시작이다. 현재 중심세력은 1970년대 초반 태어난 제2 베이붐 세대(약 1천4백만명) 남성들인 30대 초반이다.
이들이 자랄 때는 풍요로웠다. 일본은 경제대국이 됐고 국민들은 중류로 인식했다. 그러나 이들이 성장하면서 점차 시대와 운이 맞지 않았다. 이 세대의 인구가 많아 수험 경쟁이 치열해졌고 진학률도 낮았다. 거품이 붕괴되면서 취업도 어려웠다. 반면 풍요롭게 자라온 환경 때문인지 신분 상승 욕구는 크지 않고, 일보다는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미우라는 하류사회의 더 큰 문제는 5년쯤 뒤라고 지적한다. 동료 샐러리맨들이 회사에서 자리를 잡고 연수입도 높아지면서 격차가 벌어지는 시기다. 반면 자신들은 결혼은커녕 직장도 없이 초라해지면서 질투를 느끼게 되고 범죄 유혹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요즘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흉악범죄자들 가운데는 30대 중반이 적지 않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국가 사회의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일본은 요즘 철저하게 자기책임주의 사회로 바뀌고 있다. 정부 역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 복지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저출산, 고령화 대책만으로도 등이 휠 정도다. 미우라는 “지금 젊은이들 가운데는 로또 복권에 빠져있는 이들이 많다. 주간지 같은 데 나오는 ‘파칭코나 복권에서 돈 버는 법’의 주독자층도 이들이다. 인생 역전에 대한 희망은 갖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에너지를 엉뚱한 방향이 아닌 일로 향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 꿈 가져야 상류로 간다
미우라가 규정한 하류를 보는 기성세대의 시각은 상반된다. 대다수는 차갑다. 고생 안하고 큰 젊은이들의 응석이라는 견해다. 한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신규채용시 면접 때 “그동안 가장 고생했던 게 뭐였는지”를 물어보면 요즘 젊은이들이 온상 속의 화초로 큰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돌아온 대답은 대부분은 수험 실패나 아르바이트에서의 사소한 다툼 등이라고 한다. 그는 “먹는 데 고생했던 경험을 지금의 젊은이들한테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얘기를 들어보면 그 정도 고생밖에 안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반면 이들의 소외현상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인 만큼 하류사회에 있는 젊은이들은 주류사회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미우라는 “사회가 모든 걸 제공하니까 젊은이들에게서 의욕을 찾아볼 수도 없고, 창조력도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 전체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우라의 제언은 간결하다. 그는 “가장 자신 있는 일을 하라”고 권한다. 전문가들은 하류탈출법으로 젊은이들에게 꿈을 가질 것을 권한다. 경제 월간지인 <보스>는 아예 최신호에서 ‘하류에서 상류로, 지금이 최대·최후의 기회’라며 선배 경영자들의 하류 탈출법을 내놓기도 했다.
경영자들이 맨 먼저 지적하는 것은 포부다. 고교 중퇴 뒤 아버지의 파칭코 가게에서 소일하다 인터넷 사업을 시작한 GMO 인터넷의 구마타니 사장은 “고매한 목표 의식보다는 부자동네에서 살고 싶다, 인기 탤런트와 선을 보고 싶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꿈을 이루려 한다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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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채 재일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