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상호출자제한 대기업집단으로 묶인 상당수 대기업은 경영권 승계나 지배구조 개편 문제를 안고 있다. 그간 국내 대기업들은 오너 일가가 소유한 비상장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고 손쉽게 부를 증식해오기도 했다. 또 오너 일가는 비상장 계열사 기업 가치를 키운 다음 지주회사와 합병,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승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와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대기업들의 일감 몰아주기와 경영권 편법 승계에 강력 제재를 가할 것으로 예견되면서 기업들의 지분 매각과 지배구조 개편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재벌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높은 가운데 기업들의 공정거래위원회 칼날 피하기 대비가 한창이다. 21일 서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경제민주화전국네트워크와 참여연대 관계자들이 경제민주화 실현 등 7대 과제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화그룹은 한화S&C 사업부문을 물적분할하고 지분 일부를 외부 투자자에게 매각하는 딜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한화S&C는 시스템통합(SI)·네트워크 구축 등을 주로 하는 비상장 회사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가 지분 50%를,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와 삼남 김동선 전 한화건설 팀장이 나머지 지분 25%씩 갖고 있는 오너 일가 회사다.
한화S&C는 그동안 일감 몰아주기 의심 기업으로 거론돼왔다. SI사업을 영위하면서 그룹 계열사를 통해 매출을 쉽게 올려왔기 때문이다. 한화 S&C의 2016년 매출액 중 67.56%가 국내 계열사간 내부거래에서 이뤄졌다. 공정거래법상 오너 일가가 지분 20% 이상 보유한 비상장사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들어가고, 연간 내부거래를 통한 매출액이 200억 원 이상이거나 매출의 12% 이상일 경우 일감 몰아주기로 간주된다.
한화S&C는 물적분할을 통해 내부거래 비중이 높은 IT 사업부문을 100% 자회사로 분리해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서 벗어나고 신설 사업부문의 지분 매각을 통해 오너 일가의 지분율을 낮추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한화S&C의 경영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기 때문에 최대 49%까지 지분을 매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화S&C는 한화그룹 경영권 승계 작업의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화S&C는 한화에너지 지분 100%를 가지고 있으며, 한화에너지→한화종합화학→한화큐셀코리아→한화토탈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즉 자본금 5896억 원에 2016년 매출액이 3641억 원인 한화S&C가 한화그룹의 에너지계열사를 전부 지배하고 있는 것.
김승연 회장과 아들들은 한화S&C를 그룹의 실질적 지주회사인 ㈜한화와 합병시켜 경영권 승계 작업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투자은행(IB)업계에서는 한화S&C의 물적분할로 신설되는 자회사의 지분매각 대금으로 오너 3세의 그룹 지분 확보 움직임이 나타날 경우, 추후 ▲㈜한화 지분을 직접 인수하거나 ▲㈜한화를 인적분할 후(투자부문과 사업부문) 투자부문과 한화S&C를 합병하는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번 한화S&C 지분 매각은 일감 몰아주기와 관련한 대응책”이라며 “향후 경영권 승계를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한진그룹도 공정위 제재를 피하기 위해 잰걸음을 내딛었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은 지난 6월 15일 한진칼·진에어·한국공항·한진정보통신·유니컨버스 등 5개 계열사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일감 몰아주기 의혹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계열사인 유니컨버스 개인지분을 대한항공에 증여했다.
유니컨버스는 조원태 사장 등 오너 일가가 지분 100%를 보유한 회사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11월 계열사 간 내부거래로 부당 이익을 제공받아 공정위에 과징금을 부과받고, 검찰에 고발된 바 있다. 재계 관계자는 “대한항공이 선제적으로 대응을 잘해 크게 문제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재벌개혁 의지가 강해 기업들이 긴장하고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28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공정위 세종심판정에서 취임 후 처음으로 열린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강화되면 문제가 되는 기업이 많이 늘어날 전망이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상장사 이노션은 오너 일가 지분이 29.99%를 차지하고 있어 규제가 강화되면 지분율을 낮춰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노션의 내부거래 비중은 2014년 49%, 2015년 53%, 2016년 58%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현대글로비스 역시 오너 일가 지분율이 29.99%인데 2014~2016년 내부거래가 전체 매출의 65% 이상을 차지해 조치가 필요하다.
롯데그룹은 신격호 명예회장 등 오너 일가가 24.77% 지분을 보유한 비상장사 롯데정보통신은 지난해 매출 중 93%를 계열사 간 내부거래에서 올렸다. GS그룹의 경우 오너 일가 지분이 51%에 달하는 비상장사 옥산유통의 지난해 매출 중 32%가 내부거래로 일어났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일감 몰아주기 실태를 개선하기보다 법망을 교묘히 피하는 형태로 규제를 회피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정위가 더 이상 기업 편에 서지 않을 것”이라며 “법을 지키지 않고 교묘히 빠져나가는 것부터 없애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사업 영위에 필요한 회사를 세우고 수직계열화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일감 몰아주기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 수직계열화가 밖에서는 일감 몰아주기로 비치기 십상”이라며 “기업들도 일감 몰아주기 이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는 공정위의 칼날이 삼성·현대차·SK·LG·롯데 등 재계 순위 상위 대기업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한다. 삼성과 현대차그룹이 공정위 칼날을 피해 지주사 전환과 경영권 승계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이목이 집중된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현대차가 지주사 전환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바람막이가 되어주던 삼성의 경영시계가 멈춰 현대차로서는 더욱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4대 기업의 경우 내부적으로 (지배구조 등) 정돈이 잘 돼 있어 공정위가 분석을 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며 “비교적 시간이 덜 걸리는 기업을 위주로 살펴본 다음 4대 기업으로 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