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즈음에 친분이 있는 김동규 전 주택공사 사장이 내게 근대5종연맹 부회장직을 제안하셨다. 그분이 김영삼 대통령의 민주당 총재 시절, 비서실장을 역임한 분이다. 근대5종에 무슨 종목이 있는지도 몰랐던 체육 문외한인 내게 그런 제안을 했을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근대5종에는 수영 펜싱 사격 승마 크로스컨트리가 포함됐는데 이 종목들이 5개가 모여 있으니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김동규 전 사장은 내게 근대5종연맹의 화합과 소통을 당부했다. 치열하게 싸우면서 일했던 시절이었다. 이후 이연택 전 대한체육회 회장이 카누연맹을 맡아 달라고 하셨다. 당시 카누연맹은 직원들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할 만큼 재정 악화 상태였다. 그걸 정상화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이후 대한체육회와 계속 인연을 맺으며 일하다 여기까지 오게 됐다.”
―광저우아시안게임과 런던올림픽 선수단 단장을 맡으며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대표팀 선수들과 동고동락했었다.
“비체육인으로서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국제대회이다 보니 선수단 성적도 중요했는데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는 2위를, 런던올림픽에선 종합 5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선수들의 애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시간들이었다. 체육인들한테 무엇이 필요한지, 체육계가 어떤 변화를 원하는지를 체감했다. 전국체전 위원장을, 대한체육회 수석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누구보다 체육계의 현실을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체육계에선 이 회장을 ‘싸움닭’이라고 평가하더라.
“이전 신재민, 김종 등 문체부 2차관 등과 자주 대립했었다. 자기 편하려고 아는 것을 행동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비겁한 것 아닌가. 누군가가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면 두려워하지 않았다. 체육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조직을 흔들어 놓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체육계를 흔들면 한국 체육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그걸 막으려고 대립한 것이다.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사건이 벌어지면서 체육계가 힘든 시기를 맞이했었는데 이젠 그 상처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면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체육 100년의 새 이정표가 될 ‘대한체육회 아젠다 2020’의 초석을 다지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이 사업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나(대한체육회 아젠다 2020의 8대 추진 과제는 ①체육 단체 운영 자율성 확대 위한 정관 및 제 규정 개정 ②대한체육회 조직 및 예산 운영 효율성 강화 ③스포츠비리신고 센터 기능을 대한체육회로 이관 ④체육진흥투표권 ‘스포츠토토’ 수익금 정률 배분 제도화 ⑤진천선수촌 2단계 공사 이후 국가 대표 선수촌 운영 방안 ⑥체육인 교육센터 설립 ⑦대한체육회 100주년 기념 사업 추진 ⑧스포츠 마케팅 자회사, 스포츠 전문 케이블 TV 설립이다).
“먼저 아젠다 2020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왔는지부터 설명하겠다. 우리나라 운동선수, 지도자, 학교 교사, 체육인들, 언론인 등을 상대로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한 조언들을 모았다. 어떤 이는 50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내용을 정리해서 보내기도 했다. 모두 1350개의 안건이 모였고, 그중 중복되는 걸 피해서 50개의 안건으로 축소한 다음 그 항목들을 갖고 5000여 명의 체육인을 상대로 또 다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렇게 추려가는 과정에서 제1기 미래기획위원회를 발족 운영시켰다. 미래기획위원회는 회장 자문기구인데 일부러 체육인들을 배제하고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 등 각계 전문가 13명으로 구성했다. 체육인들이 주장하는 의견을 제3자인 국민의 시각으로 안건을 검토해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후 법령 제·개정을 통한 국민 스포츠 기본권 실현을 위한 제2기 미래기획위원회를 발족 운영했다. 주로 입법 전문가들과 행정 회계 감사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안건들을 갖고 각 경기단체 사무국장, 시도체육회 사무국장을 초대해 연수를 가졌고, 전국을 돌며 각 연맹 회장, 시도지사들을 만나 의견 수렴을 거쳤다. 공청회도 실시했다. 취임 후 지금까지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체육회가 제시하는 사업들을 설명하고 입법화하기 위해 작업하는 중이다. 그 혜택은 고스란히 체육인들, 경기인들, 꿈나무들한테 돌아갈 것이다.”
―체육회 통합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통합, 화합에 힘쓰겠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갈등의 골이 깊다는 의견도 있다.
“공감한다. 지금 당장 내 일자리를 잃고 내가 갖고 있는 지위를 잃는 데 따른 걱정과 염려가 있는 것 같다. 그들을 안정시키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게 내 임무이기 때문에 국회를 다니며 열심히 일자리 창출에 대해 역설 중이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체육계의 발전을 위해 믿고 기다려주길 바란다.”
―평창동계올림픽 개최가 20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인 만큼 많은 기대와 함께 우려의 시선도 크다.
“무엇이든지 조급하게 진행해선 안 된다. 급진적인 변화를 이루다 보면 실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회 준비는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체육회에서는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대표선수 경기력 향상에 온 힘을 기울일 예정이다. 객관적 실력으로 본다면 한국 선수단 종합 성적은 금메달 6개에 8위가 맞다. 그러나 홈 어드밴티지의 이점을 고려해서 금 8, 은 4, 동 8개 등 총 20개의 메달로 종합 4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대회에 이전 대회 이상의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국민들의 실망이 클 것이다.”
―1년 전만 해도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평창올림픽의 성공을 걱정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을 것 같다.
“전혀 상상도 못했다(웃음). 대한민국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100년에 많아야 한두 번 있는 국제대회 아닌가. 대한체육회 회장을 맡게 된 나로선 영광일 따름이다. 물론 영광만큼 준비 과정이 고통스럽긴 하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기업 후원이나 붐 조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기업에서 올림픽대회 지원에 부담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얼마 전 이낙연 국무총리를 만났을 때 다른 건 몰라도 선수들 사기 진작을 위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 총리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변주시더라. 올림픽은 대한민국 체육사에 큰 획을 긋는 국제 대회이다. 모든 체육인들이 힘을 모아 대회 성공을 도와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WTF 세계선수권대회 개회식 축사로 남북 단일팀 구성을 제안한 건 맞지만 우리만 하고 싶다고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남북 체육 교류는 공론화시키는 게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조용하면서도 꾸준히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여자아이스하키의 남북 단일팀 구성 추진에 대한 반발 여론이 만만치 않다.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우리 선수들이 걱정하는 건 북한 선수들이 합류할 경우 엔트리에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약 단일팀이 구성된다면 그 전에 IOC에 의뢰해서 대표팀 엔트리를 늘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예정이다. 남북단일팀은 올림픽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특례 조항으로 엔트리를 늘려 달라고 제안할 것이다.”
―국내 체육인의 IOC 위원 발탁은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모두가 바라는 염원이다. 그러나 이 회장이 IOC 위원 입후보 신청서를 낸 걸 두고 ‘셀프 추천’이라고 비난하는 배경에는 공론화와 합의과정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회장 취임 이후 이런저런 사안들을 챙기고 실행에 옮기느라 IOC 위원에는 전혀 관심조차 두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6월 초 IOC로부터 한 통의 문서를 받게 되면서 자세히 알게 됐다. 대한체육회는 그동안 조양호 전 부회장을 국내올림픽위원(NOC) 자격 IOC 위원으로 지속적으로 추천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IOC 위원은 개인 자격(70명)과 선수 자격(15명), 국제경기단체(IF) 자격(15명), 국내올림픽위원(NOC) 자격(15명)의 총 4개 부문에서 선출 가능한데 이중 NOC 자격 IOC 위원은 정원 15명 중 13명으로 두 자리가 비어 있다. 일본 NOC 회장과 중국 NOC 부회장이 각각 NOC 자격으로 추천돼 IOC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한국은 NOC 자격 IOC 위원이 없기 때문에 한국의 NOC 위원장 자격을 겸하고 있는 내게 기회가 온 것이다. 처음엔 NOC 부위원장인 김성조 한국체대 총장,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 최문순 강원도지사 등을 만나 입후보에 나오길 부탁드렸다. 각자 하는 일들이 있는 터라 아무도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역대 대한체육회 회장들을 만나 조언을 구했더니 모두 내가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솔직히 부담이 컸다. 괜한 욕심으로 비춰질까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체육 원로들이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NOC 자격의 IOC위원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입후보 신청서를 내라고 밀어준 것이다. 올림픽이 있는 만큼 이번에야말로 또 한 명의 IOC 위원을 배출할 수 있는 적기라고 한다. ‘셀프 추천’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있지만 그건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일 뿐이다.”
(대한체육회의 한 관계자는 “현재 NOC 자격의 IOC 위원 13명 중 11명이 각국의 NOC 위원장으로 꾸려져 있다. 한국 NOC 위원장인 이기흥 회장이 입후보자로 나서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니다”면서 “평창겨울올림픽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있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스포츠 외교의 균형을 생각할 때 이 회장의 IOC 입후보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회장 취임 후 인사를 하는데 있어 원칙을 잃은 보은 인사라는 지적도 있었다. 특히 선수촌장을 비경기인으로 발탁한 걸 두고 말들이 많았다.
“원래는 김호곤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적임자로 생각하고 정식 제의를 했었다. 김호곤 부회장을 데려오려고 정몽규 회장을 찾아가서 부탁을 했을 정도이다. 산적한 축구 현안들로 인해 도저히 협회를 나올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하시더라. 이후 이름을 공개할 수 없는 두 명의 후보자들과 접촉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지금의 이재근 선수촌장은 경북체육회 사무처장으로 많은 일을 해온 인물이다. 상주 부시장을 역임하는 등 행정가로선 더할 나위 없는 인재 중 인재이다. 그도 처음에는 고사했다. 대구까지 삼고초려해서 겨우 모신 분이다. 대신 부촌장직을 신설해서 경기인 출신인 이호식 부촌장을 임명했다. 이 부촌장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체조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국가대표 코치 등을 지내면서 양학선과 손연재를 발굴, 육성했던 분이다.”
―끝으로 이 회장은 한국 체육사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나.
“불교 용어에 공적영지(空寂靈知)란 말이 있다. 버리고 비우고 가야 신령스런 지혜가 나온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고 매 시간 최선을 다해 일하다보면 후배들이 날 평가해주지 않을까 싶다. 내가 물러난 후 뒤를 잇는 후배들이 내가 쌓아 놓은 ‘통장의 잔고’를 보고 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단하지 않겠나(웃음).”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