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플랜트 기자재 업체인 키스트가 검찰에 접수한 쉐브론에 대한 고소장 사본.
하지만 대우조선의 사업 발주사인 쉐브론은 계약 8개월 뒤인 지난 6월 키스트와의 계약 해지를 전달했다. 쉐브론 측은 키스트 제품을 문제삼으며, AVL(Approved Vendor List)에 명시되어 있는 기존 외산제품을 적용하기로 최종 결론났다고 통보했다.
이에 키스트는 일방적인 계약해지라며 크게 반발했다. 쉐브론 측이 대우조선을 통해 전달한 계약해지 사유가 가장 큰 문제였다. 키스트가 제작한 부품을 적용한 타 프로젝트에서 문제가 발생되는 등 안정성 문제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키스트는 일방적인 계약 해지도 모자라 납품한 적도 없는 자사 제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허위사실이라며, 300억 상당의 손해배상 등 법적조치도 언급했다.
키스트 관계자는 “초기부터 자사 제품에 관한 수많은 성능 및 검증 테스트를 공인인증기관을 통해 진행하는 등 현장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면서 “돌연 쉐브론 측이 아직 단 한 번도 납품한 적이 없는 자사 부품을 적용한 타 프로젝트에서 문제가 발생되었기에 적용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같은 사실을 대우조선에 전달하면서 자사 제품이 어떤 프로젝트에 적용돼 문제가 발생했는지에 대해 쉐브론 측에 문의를 요청했지만 현재까지 대우조선에서조차 명확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키스트는 납품을 기다리던 부품들이 회사에 방치되자 쉐브론과 대우조선 입회하에 테스트를 진행하자고 제안했지만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대우조선은 국산화 사업 추진을 위해 노력했지만 쉐브론 측 입장이 완강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키스트 측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키스트는 “기존의 외산제품만을 사용하라고 하는 쉐브론 측과 원가절감(총 100억 원 이상의 외산 제품 비용 대비 약 20~30% 절감효과, 절감액 약 30억 상당)이 가능한 국산화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대우조선을 보면서 어느 업체들이 국산화 개발에 매진하겠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 “이번 사건으로 타사(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등)와 계약 기회마저도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등 허위사실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더 커질 것 같다”며 “수년간의 연구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가장 슬프다”고 하소연했다.
대우조선해양 전경.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쉐브론 등 해외 발주사는 부품업체 선정 과정에서 AVL을 근거로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최근 해양플랜트 등 거대사업에 대한 기자재 국산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해외 발주사의 요구를 거스르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이번 키스트의 경우처럼 계약 체결 뒤 납품 목전에서 실적이 적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국내 업체들과의 계약을 파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대우조선 측은 키스트의 안타까운 사정은 이해한다면서도 쉐브론과 키스트 사이에서 어느 한 쪽 편을 들기가 어렵다며 즉답을 피했다.
대우조선과 키스트의 불공정 거래 의혹에 대해 조사에 착수한 공정위 측은 “조사 중인 사안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경위를 말해줄 수 없다”면서도 우선 조사와 함께 대우조선 측에 보상 중재 등의 조치를 진행할 뜻을 내비쳤다.
한편, 키스트는 지난달 30일 검찰에 고소장을 접수하고 쉐브론 측과 법적 공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부에선 이번 갈등이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되지 않을지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자칫 해외 거대 기업과의 관계를 의식한 국내 기업들의 국산화 사업 장려마저 위축되게 만드는 게 아니냐는 주장마저 제기된다.
불공정 거래와의 전쟁에 나선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국내 대기업에 이어 해외 대기업의 갑질 의혹에도 칼날을 겨눌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외산제품을 대체할 국산화 제품이 부당하게 제외되는 일이 없도록 정부의 대책 마련이 그 어느때보다 시급하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서동철 기자 ilyo100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