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박지원 전 국민의당 대표가 전장에 섰다. 정부 출범 이후 당·청 갈등의 중심에 섰던 추 대표는 차기 서울시장 등 한 단계 도약을 위해선 호남발 정계개편의 주도권 확보가 필수적이다. 패장 박 전 대표도 마찬가지다. 승부의 코드명은 ‘사석(바둑에서 버릴 셈 치고 작전상 놓는 돌) 전술’이다. 둘 중 하나는 죽는 게임이 시작됐다.
박지원 국민의당 전 대표와 추미애 민주당 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내 바짓가랑이를 잡지 말라”(추 대표) vs “내가 조작 음모에 가담했다면 추 대표에게 내 목을 내놓을 테니 검찰 수사를 지켜보라”(박 전 대표). 그야말로 정면충돌이다. 칼춤이 난무한다. 추 대표와 박 전 대표의 충돌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토사구팽에 맞서는 육참골단’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를 “호남발 정계개편의 서막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으로 표현했다.
선공은 추 대표가 날렸다. 국민의당의 문재인 대통령 아들 준용 씨 고용정보원 취업 특혜 의혹 제보 조작 의혹을 ‘대선 공작 게이트’로 명명한 이도 추 대표다. 추 대표는 6월 28일 국민의당을 향해 “끔찍한 정치공작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고 비판한 뒤 7월 6일엔 ‘모르쇠’로 일관하는 박 전 대표와 안철수 전 상임 공동대표를 향해 “(꼬리 자르기를 넘어) 머리 자르기”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추 대표는 국민의당이 문준용 취업 특혜를 위한 특검안을 역제안하자 최전선 공격수 역할을 마다치 않았다. 이른바 ‘이유미 사태’가 안 전 대표를 넘어 박 전 대표를 덮친 결정적 계기였다. 추 대표의 잇따른 공격에 대표 임기 종료 후 좀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던 박 전 대표는 일본의 사무라이를 연상케 하는 ‘목을 내놓겠다’는 표현으로 날을 세웠다.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추 대표의 ‘머리 자르기’ 발언 후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를 자청, “당 대표 사퇴는 물론 정계은퇴를 해야 한다“고 파상공세를 폈다.
대선 이후 두 당의 전·현직 대표인 이들의 정치적 상황은 ‘안갯속’이다. 추 대표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부터 당·청 갈등의 중심에 섰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지 못한다면, 차기는 기약하기 어렵다. 박 전 대표도 마찬가지다. 추 대표는 수도권(서울 광진을) 5선, 박 전 대표는 호남(전남 목표) 4선이다. 추 대표는 ‘중진 물갈이’, 박 전 대표는 ‘호남 물갈이’ 대상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 양측 모두 ‘고군분투 생존기’를 연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추 대표의 승부수는 ‘100만 권리당원 배가 운동’이다. 추 대표는 정부 출범 한 달 정도가 지난 6월 7일 전북을 시작으로 전국 순회 최고위원회를 열며 당원 모집에 돌입했다. 당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추 대표 시나리오의 경우의 수는 ▲당의 외연 확장 ▲서울시장 경선 대비용 ▲독자적인 추미애-김민석계 만들기 등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추 대표는 당원 표창 수여식도 전개했다. 이는 지방선거 공천 때 가산점으로 활용된다.
명분은 당의 외연 확장이다. 민주당은 5·9 대선 경선인단 때도 200만 명 이상을 모집했다. 이들 중 일부를 권리 당원으로 당에 유입시키면 당의 외연을 확대할 수 있다는 논리다. 반론도 있다. 비노(비노무현)계 한 관계자는 “역대 정권의 개국공신 중에서 정부 출범 직후, 당원 배가 운동을 시작한 전례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현재 민주당 지지도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50%가 넘는다는 점에서 당의 외연 확장용 카드일 가능성은 적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당·청 갈등 빚어온 추 대표가 문 대통령이 대표 시절 온라인 입당한 ‘10만 권리당원’에 버금가는 권리당원 만들기에 나섰다는 얘기도 나돈다. ‘100만 권리당원 배가 운동’을 통해 수십만에서 수백만 당원이 입당할 경우 독자적인 세 구축도 가능하다. 친문(친문재인)계의 세 약화와 지방선거 경선 대비, 추미애계 만들기 등이 원샷으로 해결된다. 추 대표 측 인사들은 이 같은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입당한 당원들이 다 추 대표를 지지하겠느냐”라며 일축하는 상황이다.
다만 추 대표의 승부수가 국민의당발 원심력과 맞물린다면 파장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이미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의 지역구 전남 장흥의 김화자 군의원은 탈당계를 제출한 상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 교수는 “광주 정서가 만만치 않다”며 “국민의당 광주 소속 시의원과 구의원들이 민주당 입당을 타진하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과거 민주당 총선 경선에 나섰던 인사다. 민주당이 친안계와 박 전 대표 등 일부 인사를 배제하고 나머지 호남 의원들을 껴안을 것이란 전망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반론도 있다. 정계개편 속도 조절론이다. 내년 지방선거 이후 정계개편을 통해 21대 총선 판을 짜자는 것이다. 민주당 한 보좌관은 “국민의당이 소멸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지만, 내심 지방선거까지는 버텨주기를 바라는 심정”이라며 “어차피 다수가 민주당행을 원할 텐데, 우리가 합치면 저쪽(보수진영)도 통합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 ‘1 대 1’ 구도면 민주당이 완승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국민의당은 격앙됐다. 이미 추 대표의 강도 높은 발언을 ‘국민의당 죽이기’로 규정한 상태다. 박주선 비상대책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민주당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 정략적으로 국민의당 죽이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며 “이 기회에 국민의당을 짓밟고 인위적 정계개편으로 여소야대 정국을 타파하고 패권적 양당제로 가려는 정치음모”라고 힐난했다.
속내는 복잡하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7월 3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CBS 의뢰·지난달 26∼30일 조사·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국민의당 지지도는 5.1%로 최하위이자, 지난해 2월 창당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특히 호남에서는 8.7%로, 한국당(8.8%)보다도 낮았다. 당 한 관계자는 “할 말이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지방자치단체 의원들의 동요는 시작됐다. 호남 중진급에서도 이상기류가 포착된다. 지난해 4·13 총선을 앞두고 치켜세웠던 안철수 전 상임 공동대표나 호남계 박지원 전 대표 등이 벼랑 끝으로 몰렸는데도 남의 일인 양 본다. 누구 하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이가 없다. 대선 후보였던 안 전 대표 및 당 대표였던 박 전 대표 등과 호남계 사이에 균열이 발생했다는 분석도 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대선 조작 게이트 논란에 대해 “안철수계에 대한 호남계의 선제공격”이라고 말했다. 호남발 정계개편 과정에서 친안파를 희생양 삼아 사석 전술을 쓰려는 포석으로 분석된다. 이에 대해 당의 광주광역시당 위원장인 권은희 의원은 7월 5일 “지역 당원의 집단탈당은 낭설”이라며 “제보조작사건에 대한 대국민사과 이후 10일이 지난 지금까지 총 당원 수의 변화가 0.2%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이상기류는 이뿐만 아니다. 국민의당 낙마 대상자로 파상공세를 폈던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 임명동의안 채택을 밀어붙인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유성엽 국민의당 의원을 두고도 뒷말이 무성하다. ‘호남’ 출신인 김 장관의 임명에 대한 명분 쌓기에 한몫한 유 의원의 강행에는 차기 지방선거 민심을 겨냥한 전략이 깔렸다는 얘기가 나온다. 유 의원은 차기 전북도지사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호남계 의원들은 최근 지역행사에 가서 당명 대신 자신의 이름으로만 눈도장을 찍고 있다고 한다. 5·9 대선에서 안 전 대표가 국민의당 대신 ‘안철수 브랜드’를 활용한 것을 차용한 것이다. 대표적인 반문(반문재인)계인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은 대선 조작 게이트 논란 직후 곧바로 입장문을 내고 “국민의당인 게 부끄럽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후 당 진상조사단(단장 김관영)이 ‘이유미 단독 범행’으로 결론을 내자, “상식과 거리가 멀다”며 사실상 윗선을 겨냥했다.
또한 국민의당은 7월 3일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위한 심사에 나섰다. 민주당과의 전면전이 아닌 유화 시그널을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 민주당도 국민의당에 대한 공세 대신 한국당 때리기에 집중했다. 민주당 한 의원은 “국민의당은 언제 가는 함께 가야 하지 않겠느냐”면서도 “추 대표가 인위적인 정계개편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민심 없는 정계개편은 역풍을 맞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