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의 지름은 7.23㎝. 무게는 140g 안팎이다. 그러나 직접 쥐어 보면 돌덩이처럼 단단하다. 시속 150㎞로 날아오는 야구공을 타자가 맞았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압력의 무게는 약 80톤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8㎏짜리 물체가 1m 위에서 떨어져 지면에 닿았을 때의 충격과 맞먹는다.
하물며 가장 치명적인 머리와 얼굴에 공을 맞았을 때의 충격과 공포는 타자들에게 상상하기도 싫은 장면이다. 그러나 피하려 한다고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언제 어디서 공이 날아와 몸에 큰 상처를 입힐지는 예측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역시 공에 맞더라도 최대한 충격을 줄일 수 있는 장비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것뿐이다. 타자들의 헬멧이 갈수록 여러 방식으로 진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검투사 헬멧이 등장한 이유
헬멧은 타자들의 필수품이자 최소한의 보호 장치다. 모든 타자들은 반드시 헬멧을 쓰고 타석에 나선다. 1920년 메이저리그에서 레이 채프먼이라는 선수가 빈볼에 맞아 두개골 골절로 숨진 사고가 발생한 뒤 헬멧 착용이 의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 헬멧으로는 머리나 얼굴로 날아오는 공의 충격을 온전히 견뎌내기에 역부족이다. 그래서 등장한 게 바로 ‘검투사 헬멧’이다. 일반 헬멧에 왼쪽 뺨과 턱(오른손 타자 기준)을 가리는 보호판을 덧대 안면부를 보호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광대뼈와 턱 부분을 덮는 데 특화됐다. 얼굴에 공을 맞은 선수들이 가장 골절상을 많이 입는 부위라서다.
KIA 나지완 선수. 연합뉴스
# 진화한 검투사 헬멧, 상시 착용도 유행
그러나 최근에는 검투사 헬멧을 상시 착용하는 선수들이 늘었다. 요즘에는 과거처럼 일반 헬멧에 보호판을 따로 덧대는 것이 아니라 아예 검투사 헬멧 형태로 완성품이 제작돼 나온다. kt 김동욱은 2015년 퓨처스리그에서 안면 골절상을 당한 뒤 철제 프레임을 덧댄 헬멧을 지난해부터 쓰고 있다. 그는 “집에서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다가 지안카를로 스탠튼(마이애미)의 검투사 헬멧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고 했다. LG 최재원도 삼성 소속이던 지난해 공에 맞아 턱뼈 골절상을 당하자 올해부터 검투사 헬멧을 착용한 채 타석에 들어서고 있다. SK 김동엽 역시 목 근처에 공을 맞는 위험을 한 차례 겪은 뒤 올 시즌 중반부터 검투사 헬멧을 쓰기 시작했다. 새 헬멧을 착용한 첫 날 만루홈런을 터트리면서 존재감을 알리기도 했다.
더 눈에 띄는 부분은 예전처럼 ‘사후 관리’가 아니라 ‘예방’ 차원에서 검투사 헬멧을 찾는 선수가 더 많다는 점이다. KIA 나지완이 사구에 얼굴을 맞지 않고도 이 헬멧을 착용하기 시작한 첫 사례였다. 유독 몸에 공을 많이 맞다 보니 자꾸 두려움이 생겨서다. 실제로 그는 올 시즌에도 사구 부문 1, 2위를 다투고 있다. 그는 “내가 몸 쪽 높은 공에 약한 편이다. 투수들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코스로 공이 많이 날아온다”며 “헬멧 덕분에 몸 쪽 공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LG 박용택과 롯데 최준석도 얼굴에 공을 맞은 적이 없지만,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아찔한 공에 대비하기 위해 올 시즌부터 특수 헬멧을 쓰고 있다. 이들 역시 “검투사 헬멧을 쓰니 집중이 잘 된다”고 입을 모았다.
예전에 쓰던 검투사 헬멧은 “보호대가 시야를 가린다”는 단점이 종종 지적됐다. 요즘 제작되는 헬멧은 그렇지 않다. 더 정밀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LG는 박용택과 최재원의 검투사 헬멧을 공수하기 위해 국내 용품 업체에 직접 제작을 의뢰한다. LG 관계자는 “일반 헬멧에 미국에서 판매하는 보호대를 붙이는 공정을 거친다”며 “귀 쪽에 구멍을 내 피스(나사)로 보호대를 고정시킨다”고 설명했다. 보호대 가격은 5만~6만 원이다.
# 최근 유행하는 새 헬멧의 정체는?
요즘에는 검투사 헬멧에서 한 단계 진화한 특수 헬멧이 유행하고 있다. 일반 헬멧과 검투사 헬멧의 중간 형태다. 헬멧 안쪽에 더 두꺼운 충격 보호 장치를 덧대 머리 전체를 단단하게 감싸는 느낌을 준다. 이 헬멧을 육안으로 봤을 때 일반 제품보다 지름이 커 보이는 이유다. 또 귀를 덮는 부분이 더 두껍고 크게 제작돼 골절 위험이 큰 광대뼈 부분까지 가려준다. 보호대가 얼굴 앞부분까지 튀어나오는 검투사 헬멧의 단점을 보완하면서도 공을 맞았을 때 머리 전체에 가해지는 충격은 완화했다. 이 헬멧을 쓴 선수들은 “헬멧 바깥쪽 플라스틱도 워낙 단단해 기존 헬멧보다 든든한 느낌을 준다”고 증언했다.
올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당시 홈런을 치고 들어오는 김태균. 연합뉴스
대부분 각 팀 주축 타자들이 이 헬멧을 많이 쓰고 있다. 올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참가한 국가대표 타자들이 대표팀에서 이 헬멧을 지급받았기 때문이다. 이 선수들이 소속팀으로 헬멧을 가져와 정규시즌에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곧 다른 동료 선수들에게도 전파됐다. 한화의 한 선수는 “대표팀에 다녀온 형들이 쓰는 것을 보고 알게 돼 헬멧 제작 업체에 직접 주문했다”며 “확실히 이 헬멧을 쓴 채 훈련을 하거나 경기에 나서면 마음이 편하다. 공에 맞아도 충격이 덜할 것 같아 안심이 된다”고 했다.
사실 이 ‘충격 보호 헬멧’은 지난해 두산 포수 양의지가 처음 쓰기 시작했다. 양의지는 지난해 6월 23일 잠실 LG전 도중 타석에서 상대 투수의 공에 헬멧 부분을 맞았다. 정밀검진 결과 큰 이상은 없었지만, 후유증이 컸다. 간헐적인 어지럼증을 호소하다 결국 2군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한 달 뒤에는 포수로 출전했다가 상대 타자가 타석에서 휘두른 배트에 다시 머리 부분을 맞았다. 위기가 거듭되자 일부 메이저리거들이 착용하던 이 헬멧을 수소문해 직접 미국에 주문했다. 지난 시즌 막바지부터 착용하면서 심리적 안정을 얻었다. 이후 다른 구단 선수들도 관심을 보였고, WBC가 끝난 뒤에는 두산의 다른 주축 선수들도 이 헬멧을 쓰고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선수들의 반응은 ‘대만족’이다.
# 투수들을 위한 헬멧은 없을까
사실 경기 중 위험에 노출되는 건 타자들만이 아니다. 투수들도 언제든 강습타구가 날아올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한다. 올해도 이미 피해자가 나왔다. 두산 신인 투수 김명신은 지난 4월 25일 고척 넥센-두산전에 선발 등판했다가 상대 타자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에 얼굴을 맞았다. 얼굴 왼쪽 광대뼈 세 군데가 골절됐고, 안면부 골절과 함몰 수술을 받았다. 시력에 이상이 없는 게 천만다행일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이뿐 아니다. 김원형 롯데 수석 코치는 쌍방울에서 뛰던 1999년 7월 10일 대전 한화전에서 얼굴에 공을 맞아 광대뼈 세 군데가 함몰되고 코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이후 10개월간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최상덕 SK 투수코치도 1995년 태평양 시절 타구가 얼굴로 날아와 앞니 네 개가 부러지고 잇몸 열두 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당한 적이 있다. LG 김광삼 역시 지난해 8월 2군 경기 도중 타구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골절됐다. 뇌출혈 진단도 받았다. 이외에도 수많은 투수들이 강습타구를 피하지 못해 부상으로 고생했다.
그러나 타자들과 달리 투수들은 보호 장비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몸에 유니폼이 아닌 다른 장비를 착용하는 것 자체가 투구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헬멧은 물론, 초창기 투수들이 사용했던 낭심 보호대조차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사라졌다. “허리 회전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들 기피해서다.
각 팀 투수들은 스프링캠프 때 강습타구 대비 훈련을 집중적으로 한다. 그러나 타구가 눈앞으로 날아오면 일단 잡아서 처리하고 싶은 게 투수들의 본능이다. 문제는 타자들이 친 타구에는 스핀이 걸리면서 속도가 붙는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민첩한 투수도 투구 동작을 마친 뒤 곧바로 몸을 틀어 피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투수들의 안전에 대한 경각심도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메이저리그 역시 최근 ‘투수용 헬멧’을 개발해 사무국 차원에서 활성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 헬멧은 윗부분이 뚫려 있어서 기존 투수 모자 위에 덧씌울 수 있는 구조로 제작됐다. 시속 137㎞ 안팎의 타구를 견뎌 낼 수 있는 강도로 만들어졌고, 무엇보다 재질이 탄소 섬유라 무게가 300g에 불과하다. 무게를 최대한 줄여 투구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여전히 투수들은 효용성에 의심을 갖고 있다. 한 베테랑 투수는 “투구 때 쓰고 있는 일반 모자 자체도 껄끄러운데, 무게가 조금 더 나가는 헬멧까지 쓰게 되면 아무래도 공을 던질 때 불편할 것 같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상용화된다고 해도 새로운 느낌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얘기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엄지장갑’ 도루왕들 사이 대유행 부상 위험은 타석에만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니다. 그라운드 곳곳에 암초가 숨어 있다. 특히 발이 빨라 도루를 자주 시도하거나 적극적으로 베이스러닝을 하는 주자들은 늘 부상 위험지역에 머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개발된 보호 장비가 바로 ‘엄지 장갑’이다. 올 시즌 빠른 발로 이름 좀 날린다 싶은 주자들의 손에는 너도 나도 이 장갑이 끼워져 있다. 다섯 손가락이 분리되는 일반 주루 글러브와 달리, 손가락이 모두 하나로 모여 있거나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이 붙어 있는 형태다. 두께도 일반 장갑보다 두툼하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할 때 손가락이 베이스에 잘못 부딪혀 꺾이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됐다. 메이저리그에선 뉴욕 양키스의 브렛 가드너를 시작으로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 2015년부터 2년간 롯데에서 뛴 외국인 타자 짐 아두치가 미국에서 쓰던 장갑을 KBO 리그로 가져와 가장 먼저 사용했다. 국내 선수 가운데선 삼성 박해민이 처음으로 꼈다. 2014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2루 도루를 하다 왼손 약지가 꺾이는 부상을 당한 게 계기였다. 단기전을 치르고 있는 삼성에게는 수비와 베이스러닝에 능한 박해민이 꼭 필요했다. 삼성 박해민 선수. 연합뉴스 당시 삼성에 몸담고 있던 김평호 주루 코치(현 NC)는 박해민이 다친 손가락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과감하게 슬라이딩을 할 수 있는 임시방편을 고민했다. 그러다 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는 급한 대로 마트에서 엄지 장갑을 사와 박해민의 손에 끼워줬다. 공식 야구 규칙에는 배트나 글러브, 헬멧 등과 달리 주루 장갑에 대한 제한 규정이 없다. 경기 중에 어떤 장갑을 착용해도 문제가 될 게 없다. 박해민은 긴급 공수된 일반 엄지 장갑을 끼고 남은 한국시리즈 무대를 무사히 누볐다. 이듬해인 2015년 박해민은 KBO 리그 도루왕으로 거듭났다. 그 장점을 더 잘 살리기 위해 지난해부터는 엄지 장갑을 시즌 중에도 착용하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거들이 쓰는 선수용 전문 장갑을 구단이 공수해왔다. 가격은 1세트당 10만 원대 초반. 손바닥 위와 아래에 플라스틱 패널이 붙어 있는 장비였다. 그러나 오히려 딱딱한 패널이 더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패널을 제거한 채 장갑만 착용하고 있다. 박해민은 이제 뒷주머니에 엄지 장갑 두 개를 넣고 타석에 들어섰다가 1루를 밟으면 곧바로 장갑을 바꿔 낀다. 그는 “베이스를 터치할 때 전보다 훨씬 부담이 덜하다. 과감한 슬라이딩을 할 수 있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엄지 장갑은 메이저리그처럼 KBO 리그에서도 보편화되는 분위기다. 올 시즌에는 박해민 외에도 ‘엄지 장갑’ 사용자가 더 늘었다. 도루가 트레이드마크인 kt 이대형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반 주루 장갑과 비교해 전혀 불편하지 않다. 다치지 않는 게 최고라 계속 쓰고 있다”고 했다. 넥센 서건창도 국내 용품업체에서 후원을 받고 있다. 그는 “착용감이 전혀 나쁘지 않아서 팀 내에서도 쓰는 선수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KIA 외국인 타자 로저 버나디나 역시 빨간색 엄지 장갑을 끼고 과감한 슬라이딩을 한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