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의정부고 학생들의 졸업사진을 보면, 아이돌 가수부터 영화·애니메이션 캐릭터까지 올해도 예상대로 학생들의 재치 있고 기발한 패러디가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은 생활한복을 입은 가수 이효리와 대마초 사건에 연루된 가수 탑을 비롯해 애니메이션 <짱구> 속 영웅 액션가면,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패러디 등을 선보였다.
특히 올해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등 굵직한 이슈가 많아 의정부고 학생들의 촌철살인 패러디가 기대됐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학생들의 정치 풍자 사진은 지난 5월 공항에서 여행 가방을 수행원에게 넘기는 영상으로 화제가 된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의 ‘노룩패스’ 패러디가 전부였다. 과거에 의정부고 졸업생들이 고승덕 전 서울시 교육감 후보의 ‘미안하다’ 유세와 박 전 대통령의 모내기 논에 물주는 모습 등 기발한 정치 패러디로 화제를 모은 것과 비교된다.
해마다 기발한 패러디로 눈길을 끄는 의정부고등학교 졸업사진이 지난 10일 공개됐다.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올해 의정부고 졸업사진에 정치 풍자가 보이지 않은 이유는 학교 측이 학생들로부터 촬영 콘셉트를 미리 제출받아 논란이 될 만한 아이템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사전검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의정부고 학교 측과 재학생들에 따르면, 학교 측은 졸업사진 촬영일 약 한 달 전부터 검열을 통해 계획서를 제출받고 사진 찍을 콘셉트도 미리 적어내라고 학생들에게 지시했다. 또 졸업사진 촬영 당일에는 학생들의 휴대폰과 태블릿 PC 등을 수거했고, SNS 상으로도 사진을 올리지 못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의정부고 3학년 이 아무개 군(18)은 “정치적 풍자나 사회적 이슈가 될 것 같은 것들은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건 학교에서 기본으로 사전검열을 하겠다고 통보했다”고 말했다. SNS 사진 게시 차단에 대해서도 이 학생은 “원래 등교하면 휴대폰은 학교에 제출한다. 하지만 인터넷 강의 듣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태블릿 PC는 걷어가지 않는데 촬영일엔 태블릿 PC를 비롯해 사진 찍을 수 있는 전자기기는 다 제출하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 학생은 또 “(김무성 노룩패스 패러디한 학생은) 아예 계획서에 정치 패러디를 넣으면 학교에서 안 된다고 할 것을 알고 당일 사전 제출한 계획서와 달리 콘셉트를 바꾼 것으로 안다”며 “학교에선 당일 제출한 대로 안 하면 졸업사진 못 찍는다고 으름장도 놓았는데 다행히 노룩패스 패러디로 졸업사진을 찍게 됐다”고 말했다.
의정부고 졸업사진은 지난 2010년부터 온라인을 중심으로 유명세를 탔다. 사회, 정치, 문화, 연예를 총망라해 그해의 주요 이슈로 떠오른 인물로 분장을 하고 졸업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엔 의정부시 예술의 전당에서 그간의 졸업사진 가운데 가장 화제가 된 사진을 모아 ‘레전드 전시회’가 열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는 학교 측의 사전검열과 SNS 게시 차단 지침으로 이 같은 의정부고의 전통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일부 학생들은 이 같은 학교 방침에 반발했다. 익명을 요구한 의정부고 3학년 학생은 “여기가 북한도 아니고 시사 풍자를 사전검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그는 “(정치 풍자로) 학교에 항의가 온다고 해서 이를 사전 검열하고 막는 게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건 납득이 안 간다. 학생들에게 위협이 가해진다면 학교와 선생님이 그걸 막아주는 게 학교의 역할 아닌가. 그래도 이게 맞는 순서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학교 측의 방침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과의 소통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 학교 3학년 이 아무개 군(18)은 “정치 성향 차이로 논란을 걱정한다면 우리가 제출한 것에 대해 ‘이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거 같으니 조금 완화해서 하자’는 등 이런 쪽으로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며 “중간에 그런 단계가 없이 일방적으로 사전검열, SNS 금지 등을 통보하는 방식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전했다.
또 다른 학생 김 아무개 군(18)은 “내 졸업사진을 내 개인공간(SNS)에 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며 “일생일대 한 번 있는 기회고 친구들과 사전 회의도 하고 했는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안 된다고만 하니 우리 입장에선 이해 못한 부분이 솔직히 많다”고 말했다.
의정부고 학생들은 그동안 사회, 정치, 문화, 연예를 총망라해 그 해의 주요 이슈로 떠오른 인물로 분장을 하고 졸업 사진을 찍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의정부고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반면, 학교 측 입장을 이해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 학교 3학년 강동희 군(18)은 “처음엔 우리학교를 더 유명하게 해주고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데 검열을 한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런데 한편으론 지난해 학교에서 항의전화도 많이 받고 고충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학교 측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학교 측 입장과 학생들의 입장이 모두 이해가 간다고 밝힌 한 학생은 “조금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 속에 졸업사진 촬영이 진행된 것은 사실”이라며 “(학교 측 검열 지시에) 논란이 일어난 만큼 내년부터라도 잘 해결돼 다시 의정부고등학교만의 전통과 색깔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학교 측과 학생들에 따르면 실제 의정부고는 그간 다양한 콘셉트의 졸업사진으로 인해 명예훼손과 고발이 이어지는 등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졸업사진 촬영 과정에서는 ‘SNL 극한직업 유병재’를 패러디한 학생의 분장이 논란이 돼 여성 커뮤니티 회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그 이전에는 일간베스트 회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 패러디에 공식적인 루트로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아울러 의정부고가 평준화 지역에 속하기 전 졸업한 졸업생들도 학교의 위상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항의전화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수년째 이어져 온 의정부고의 졸업사진 촬영 퍼포먼스는 이번 일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12일 학교 측에 접촉을 시도했으나 “밀린 업무가 많아 언론과 대응할 시간이 없다”며 인터뷰를 일체 거절했다.
한편, 의정부고는 2014년에도 졸업사진과 관련해 학생들과 학교 측의 충돌이 있었다. 당시 이 학교 교감은 학생들의 자율적인 졸업앨범 사진 퍼포먼스를 제지, 졸업사진 검열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하자 학생들의 반발을 불렀다. 결국 교감이 학생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졸업앨범은 학생자치회에 맡겨 민주적 소통을 약속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며 갈등이 일단락된 바 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