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버지가 연필공장을 물려주려 하자 그는 거절했다. 인생을 그렇게 낭비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리고는 월든 호숫가로 들어가 손수 오두막을 짓고 자기 먹을 것을 경작해 먹는 삶을 배운 것이다. 사회는 나를 구속하지만 자연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고 했던 그는 숲속에서 소박하게 먹고 단순하게 사는 법을 익혔다.
그는 동양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만물의 어머니임을 알았다. 하긴 자연이 동양과 서양을 가르겠는가. 그가 말하길 자연은, 땅은 부를 축척하게 해주는 생산수단이 아니라 생명 있는 것들이 기대 살아야 하는 만물의 품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손수 땅을 일궈 곡식을 거두고 채소와 과일을 얻는 일은 신성한 예술이다. 자연 속에서 자기 발로 살아본 당당한 사람의 자연관이겠다.
평생을 자연과 벗하며 살아간 그의 고독은 고립이 아니라 ‘심지’겠다. 그 심지로 그는 우리에게 인간은 누구나 자기 가슴속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위로하고 격려한다. 모두 다 장미가 되라는 세상에서, 그것도 활짝 핀 6월 장미가 되라는 세상에서, 그는 바람처럼 다가와 그럴 필요가 없다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과제는 ‘자기’가 되는 것임을 일깨워준다. 민들레는 민들레여야지 장미일 필요가 없다. 장미는 장미여야지 소나무일 필요가 없다. 우리의 존재이유는 성공도 아니고, 부(富)도 아니다. 우리의 존재이유는 자기의 숲에서 자기 북소리를 들으며 자기 속도에 맞춰 성장하는 것이고 자기 속도에 맞춰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그는 40대 중반에 세상을 떴다. 갑작스레 감기가 폐결핵으로 발전했던 것 같다. 그렇게 생태적으로 살았는데 왜 ‘장수’를 누리지 못했냐고 놀라거나 비꼬는 사람도 있지만, 공자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지 않았는가. 나는 죽음에 있어서도 자연스러운 그가 좋다. 짧게 살아서 좋은 것이 아니다. 수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100세를 살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장수할 수 있지만 그저 ‘장수’가 목적인 삶은 자연스럽지 않다. 나는 우리의 삶이 길던 짧던, 건강하던 아프던, 행복하던 불행하던, 가난하던 부유하던 그처럼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오두막에는 3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해, 또 하나는 세상을 위해.”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