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은 2005년 SK 유니폼을 입고 데뷔했다. 이후 13번째 시즌 1342경기 만에 200사구 고지를 밟았다. 풀타임 주전으로 뛰기 시작한 2007년 17사구를 기록한 데 이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 연속 20사구를 넘겼다. 2014년과 2015년은 부상으로 출전 경기수가 적어 각각 사구 12개와 5개를 얻어내는 데 그쳤지만, 141경기에 나선 2016년에는 다시 23사구로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 엄청난 수치이자 마냥 웃을 수는 없는 기록이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11일 경기에서 나온 통산 200호 사구는 최정의 시즌 16번째 몸에 맞는 볼이었다. 한 시즌 20사구에 또 육박했다. 공이 자석처럼 몸에 와서 달라붙는다는 의미로 ‘마그넷 정’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선수답다.
# 현역·은퇴 선수 통틀어 적수가 없는 ‘사구 제왕’
은퇴한 선배 선수들의 기록도 이미 추월했다. 지난해 4월 8일 잠실 두산전에서 통산 167번째 사구를 맞아 이전까지 1위였던 SK 박경완(166개)을 제치고 역대 1위로 올라섰다. LG 박종호(161개), 삼성 김한수(148개), 두산 김동주(147개), 넥센 송지만(145개), SK 김재현(133개), 한화 장종훈(131개), 히어로즈 김동수(130개) 등 과거 오랜 기간 KBO 리그를 누빈 쟁쟁한 선배 타자들보다도 훨씬 많다.
현역 선수 가운데는 아예 최정의 기록을 따라잡을 적수가 없다. 최정 이외에 현역 톱 5에 드는 NC 박석민, 롯데 이대호, 한화 이성열, KIA 나지완, LG 정성훈 모두 최정과 적게는 30여 개에서 많게는 90여 개까지 차이가 난다. 최정이 아직 30대 초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 눈에 띄는 성적. 범위를 미국, 일본, 대만까지 넓혀도 마찬가지다. 4대 프로야구 리그 현역 선수 가운데 유일하게 200사구를 채운 선수가 최정이다.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몸에 공을 맞는 최정. 연합뉴스
최정은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타격한다. 선수 생활 내내 사구를 달고 다닌 이유다. 맞은 공의 구종도, 맞은 부위도 다양하다. 최정이 “직접 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지금도 온몸에 멍투성이”라고 호소한 적도 있다. 야구 관계자들은 “그렇게 몸에 맞는 공이 많이 나오는 데도 사구로 인한 큰 부상 없이 꾸준히 뛰는 게 대단하다”고 입을 모은다. 스스로도 “진짜 왜 나만 유독 많이 맞는지 모르겠다. 일부러 맞는 것도 아니다”며 “다만 크게 다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최정의 몸이 강하고 단단하다는 얘기도 된다. 프로야구 선수는 몸이 재산이다. 최정은 엄청난 재산을 보유한 선수다.
최정은 사구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 선수로도 유명하다. 200번째 사구도 그랬다. 시속 136km 직구에 보호대가 없는 왼쪽 팔뚝을 세게 맞았다. 자칫 얼굴에 맞을 뻔했던 아찔한 투구였다. 그러나 최정은 사구 후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1루로 향했다. 설사 고의성이 느껴지는 빈볼이나 위협구라고 해도 웬만하면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200번이나 사구를 맞은 선수가 벤치 클리어링에 연루되는 일은 거의 없다. “사구도 경기의 일부”라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투수가 몸 쪽 공을 던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해야 투수가 타자를 잡을 수 있다”며 “물론 아프지만 내가 화를 내도 결과가 달라지는 건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다만 단 한 차례 이례적으로 크게 감정을 드러낸 적이 있다.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지는 LG 전 외국인 투수 레다메스 리즈의 투구에 맞은 뒤였다. 그는 “나도 맞으면 순간적으로 화가 난다. 리즈에게 맞을 때는 공이 얼굴로 날아오는 줄 알았다”며 “손 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맞았다’ 싶어서 계속 소리 질렀다. 죽는 줄 알았다”며 웃었다.
# 통산 200사구는 어떻게 나왔나
최정은 지난해 40홈런을 쳤다. 올해는 50홈런 페이스로 홈런 1위를 질주하고 있다. 통산 홈런은 벌써 250개를 넘겼다. 사구는 최정 같은 타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그림자다. 최정을 상대하는 투수들은 무조건 장타를 피하고 싶다. 의식적으로 몸 쪽에 바짝 붙는 공을 던지게 된다. 문제는 컨트롤이다. 제구가 잘 안 되면 곧바로 사구로 이어진다.
최정은 그럴 때 피하지 않고 맞선다. 정경배 SK 타격 코치는 “최정은 몸 쪽 공을 잘 칠 수밖에 없는 스타일이다. 공이 몸 쪽으로 와도 절대 몸을 뒤로 빼지 않는다. 여러 가지 구종에 대처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 “공을 오래 보는 스타일이다. 피할 수 있는 공도 끝까지 보다가 공에 맞는 일이 있다”고 설명했다.
최정도 사람이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공이 당연히 두렵다. 그는 “무섭지만 최대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고통을 이겨낸 결실은 분명히 있다. 사구를 의식하다 타격 밸런스가 깨지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 타격 폼을 수정하거나 급히 자세를 바꿔 장타를 치지 못하는 것은 최정에게 몸 쪽 공을 던지는 투수들이 가장 바라는 결과다. 앞서 언급했듯 최정 역시 몸 쪽으로 승부해야 먹고 살 수 있는 투수들의 생리를 이해한다. 다만 그 전략에 지지 않기 위해 사구와 타협하지 않는다. 그냥 맞고 1루로 걸어간다. 대신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맞는 쪽을 선택했다. 위험한 부위가 아닌 등이나 엉덩이에 공을 맞는 것이다.
물론 부상을 피하려면 사구는 무조건 피하는 게 최선이다. 타석에서 공격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다 더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최정은 “신기록이라 해도 기뻐할 수만은 없는 기록”이라며 “아내나 가족들은 내가 자주 공에 맞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사구를 생각하면 나도 기분이 좋지 않다. 아찔한 기억이 많다”고 털어 놓았다. 최정에게 역대 최다 사구 타이틀을 넘겨준 박경완 SK 코치도 “자칫 잘못하면 선수생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기록이다. 더 이상은 신기록 수립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 박종호는 한 시즌 최다 사구, 이강철은 통산 최다 허용
역대 최다 사구 기록은 최정의 소유가 됐다. 앞으로 최정이 몸에 공을 하나씩 더 맞을 때마다 기록이 늘어난다. 그러나 KBO 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 사구 기록은 1999년 현대 박종호가 기록한 31개다. ‘인간 자석’이라는 최정도 2013년 24개가 한 시즌 최다다. 앞으로 깨기도 어렵고, 깨서도 안 되는 기록이다.
한 경기 최다 사구는 3개. 역대 13명의 타자가 공동으로 기록했다.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3연타석 사구다. MBC 김인식, 삼성 이만수, 쌍방울 조용호, 해태 박재벌, 태평양 백성진, 빙그레 진상봉, LG 최훈재, 삼성 정경배, LG 홍현우, LG 박경수, 한화 이성열, NC 김종호, 두산 양의지가 세 타석 연속으로 공을 몸에 맞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이름들이다. 또 한 이닝에 타순이 한 바퀴 돌면서 두 번 연속 몸에 맞는 볼로 출루했던 선수들도 있다. 태평양 김동기는 1988년 5월 5일 인천 삼성전 6회, 이성열은 넥센 시절이던 2013년 5월 15일 목동 한화전 8회에 각각 한 이닝 2사구라는 진기록을 작성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구를 가장 많이 내준 투수는 누구일까. KBO 리그 통산 사구 1위는 역대 최고 잠수함 투수로 꼽히는 KIA 이강철이다. 189개를 내줬다. 역대 2위 역시 현역 선수이자 잠수함인 KIA 임창용이다. 지난 시즌까지 SK에서 은퇴한 김원형과 136개로 공동 2위였고, 올해 다시 사구를 추가하면서 2위로 올라섰다. 이 외에도 LG 정삼흠, 두산 다니엘 리오스, SK 김정수, 한화 한용덕, 한화 송진우 등이 통산 사구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모두 현역 시절 명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만큼 몸 쪽 승부를 즐기는 공격적 피칭을 했다는 의미도 된다.
이 가운데 리오스는 KIA 시절인 2003년에 사구 28개를 던져 한 시즌 최다 사구 허용 기록을 남겼다. 한 경기에서 가장 많은 사구를 기록한 투수는 쌍방울 김경진이다. 1999년 5월 15일 대구 삼성전에서 6⅔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무려 6개의 몸에 맞는 볼을 던졌다. 거의 이닝 당 한 개꼴이다. 삼성 양일환, 쌍방울 김경진, 한화 이상목, 한화 김해님, KIA 손영민, 롯데 허준혁, KIA 윤석민, 한화 허유강, 롯데 정대현, LG 신승현은 각각 세 타자에게 연속 사구를 허용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특히 윤석민은 2007년 9월 11일 광주 한화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하자마자 첫 세 타자를 모두 몸에 맞는 볼로 내보내는 아찔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000년대 초중반 최강팀으로 군림한 현대는 2005년에 한 시즌 팀 120사구로 독보적인 역대 최다 기록을 남겼다. 2003년에도 팀 사구 109개를 기록해 2005년 삼성, 2015년 한화와 함께 역대 최다 공동 2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반대로 롯데는 1986년 롯데와 1987년 OB는 한 시즌 내내 팀 타자 전체가 24개만 사구를 맞아 역대 최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1997년 5월 4일 대구 시민야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LG의 경기에선 무려 9개의 몸에 맞는 볼이 쏟아졌다. 삼성 타선은 1999년 5월 15일 대구 쌍방울전에서 도합 7개의 사구를 기록하기도 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285사구’ 크렉 비지오, 대형 팔꿈치 보호대 기증 메이저리그 통산 사구 1위는 1890년대에 선수 생활을 한 휴이 제닝스(287개)다. 하지만 범위를 20세기로 좁히면 은퇴한 크렉 비지오가 285개로 압도적인 1위다. 비지오는 1988년부터 20년간 휴스턴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다. 휴스턴 역사상 최고의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그 기간 동안 무려 5번이나 내셔널리그 몸에 맞는 공 1위에 올랐다. 1995년부터는 3년 연속으로 리그에서 가장 사구가 많은 선수로 기록됐다. 사진 출처 : 크렉 비지오 페이스북 사구는 위험하다. 시속 140km 이상의 투구에 맞으면 순간적으로 약 80톤의 압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비지오도 사구에 대해 “생계를 유지하는 고통스러운 방법”이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현역 시절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큰 손목 보호대와 팔꿈치 보호대를 착용했다. 일각에서 “그 보호대가 지나치게 커서 팔꿈치 쪽에 맞는 사구가 더 많아졌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몸에 공을 맞는 비지오에게 특수한 보호대는 필수품이었다. 그 덕분에 한 번도 사구로 인한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없다. 오히려 사구 후 절대 마운드의 투수를 향해 달려들지 않는 선수로 유명했다.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킨 적이 한 번도 없다. 상대팀이 의도적으로 위협구를 던져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사구는 투수가 몸 쪽으로 공을 던지려다 나오는 경기의 일부”라고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이런 부분은 최정과 비슷하다. 메이저리그 출신인 트레이 힐만 SK 감독도 최정을 보며 비지오를 떠올렸다고 했다. 최정이 200사구 기록을 세운 다음날 취재진에 “예전에 비지오와 얘기를 나눠보니, 공을 맞는 순간 고의성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출루할 수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더라”며 “그런 자세로 임하려면 멘탈이 강해야 한다. 최정이 바로 그런 선수”라고 했다. 또 “공을 맞고도 크게 흥분하지 않는 것은 정신력의 일부다. 비지오와 최정 모두 그런 점을 갖췄기에 좋은 타자인 것 같다”고 치켜세웠다. 비지오는 20세기 이후 가장 많은 공을 맞았지만, 아쉽게도 제닝스가 보유한 ‘올 타임’ 기록에는 단 2개가 모자란 채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40대로 접어들면서 맞이한 마지막 두 시즌에 사구가 많이 나오지 않았던 탓이다. 2006년 사구가 아홉 개로 줄어든 데 이어 마지막 시즌인 2007년에는 단 세 차례만 사구로 출루했다. 두 시즌 사구 합계가 총 12개. 이전까지 11년 연속 두 자릿수 사구를 기록했던 비지오이기에 더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당시 비지오가 제닝스의 기록을 넘어설 수 있을지가 메이저리그의 화제 가운데 하나였다. 결국 비지오가 신기록 문턱에서 실패하자 한 온라인 매체는 ‘비지오가 285사구에서 멈춘 것은 언론의 압박 탓’이라는 풍자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러나 비지오가 당대 최고의 선수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통산 3060안타를 때려내고 포수와 2루수, 외야수로 모두 정상급 활약을 펼친 간판 스타였다. 역사에 새겨질 사구 기록 역시 비지오의 열정을 상징하는 산물이다. 비지오는 2015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자신이 현역 시절에 쓰던 대형 팔꿈치 보호대를 기증했다. 통산 285사구 기록의 기념품이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