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북한의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에 등장한 탈북여성 임지현(본명 전혜성)씨. 우리민족끼리 캡처.
2014년 1월 탈북해 국내로 들어온 임 씨는 TV조선에서 탈북여성들이 주로 출연하는 프로그램 <모란봉클럽>, <애정통일 남남북녀> 등에 출연해 이름을 알렸다. 팬클럽까지 있을 정도니 국내 방송에 출연한 탈북 여성 가운데에선 꽤 인기가 있었던 편이다.
임 씨는 지난 4월 방송에서 하차한 뒤에도 팬클럽이 주최한 생일파티에 참석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돌연 북한의 대남선전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방송 활동을 전면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 탈북했던 임 씨가 다시 북으로 돌아간 것이다.
탈북여성 지원단체에서 근무하고 있는 탈북민 A 씨는 “탈북민들이 재입북하는 경우는 두 가지 밖에 없다. 첫 째로 남파된 간첩이어서 복귀하는 경우와 남한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진 입북하는 경우”라고 지적했다. 이 두 경우가 아니라면 ‘납북’이라고 판단한다는 것.
A 씨는 “사실 납북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라질 수 있지만 탈북민 커뮤니티 내에서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라는 분위기”라고도 설명했다. 그는 “남한에 정상적으로 정착하고자 하는 탈북민들은 절대 방송에 나서지 않는다. 탈북민들 사이에서는 (임 씨처럼)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을 ‘북에 남겨둔 부모 형제를 버린 사람들’이라고 치부한다”고 지적했다.
A 씨는 “탈북민들을 출연진으로 한 방송 내용 대다수가 거짓이다. 임 씨만 해도 자신이 북한 선전대 출신으로 인민군 상위였다고 주장했지만 선전대는커녕 군관학교 근처에도 못 간 사람”이라고 밝히며 “이처럼 거짓 프로필을 만들고 북한에 대한 허위정보를 방송을 통해 퍼뜨리는데 체제에 큰 위협이 되는 임 씨와 그 가족을 그냥 내버려 두겠나. 북한 보위부는 바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간첩 가능성에 대해서는 “결코 아닐 것”이라고 일축하는 분위기다. 또 다른 탈북민 B 씨는 “북한에서 간첩은 ‘대남혁명가’로 ‘혁명동지’다. 간첩 활동을 끝내고도 그 이후의 생활까지 보장될 정도로 중요한 인력 자원인데 그런 사람의 얼굴을 공개하고 방송에 내보내진 않는다”고 설명했다.
납북 가능성을 비친 B 씨는 “(임 씨가) 북한 비방 방송에 출연한 것이 독이 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방송에 나와서 쉽게 돈 벌고 싶은 마음이 다른 탈북민이라곤 없었겠나”라면서 “아직 북한에 가족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해가 될까봐 공개적인 활동조차 꺼리게 된다. 그런데 북한이 가장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방송에 나와 격렬하게 북한을 비판했으니 타깃이 될 만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TV조선 프로그램 ‘애정통일 남남북녀’에 출연했던 임씨의 모습. TV조선 캡처.
북한의 최근 동향도 임 씨의 납북설에 힘을 보태고 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최근 북한에서는 ‘한국에서 연예계 활동을 하고 있는 탈북 여성들에게 재갈을 물리겠다’는 지령이 내려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라며 “재입북 의향이 있는 탈북민들 가운데 자금을 가져올 경우에는 노동당에 입당시켜 대우해주고 TV 출연도 시켜주겠다는 식으로 이들을 현혹하기도 했다. 순진한 사람들은 속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안 소장은 자진 입북의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탈북에 비하면 재입북은 쉽다. 중국에 있는 북한 영사관에 들어가 북한으로 가겠다는 말만 하면 된다”라며 “알아보니 임 씨의 남한 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북한이 말하는 꼬임에 넘어가 자진해서 입북했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임 씨의 과거 행적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한 매체는 지난 6월 충북지방경찰청이 대거 입건했던 음란방송 VJ 가운데 ‘탈북여성’으로 알려진 VJ가 임 씨일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충북경찰청 측은 “입건된 VJ는 아직 한국에 있으며 임 씨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명했다.
다만 한국 방송 출연을 하기 전까지 다소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부분에 대해선 임 씨를 아는 탈북민들이 모두 동의했다. 이들은 “북한 여성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를 통해 탈북하는 과정에서 브로커에게 인신매매나 사기를 당해 술집이나 성인방송 VJ로 일하는 경우가 있다. 임 씨도 정확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흥업소 등에서 일을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동아일보>도 “임 씨가 과거 중국에 머물 때 출연한 음란방송 내용이 국내에서 뒤늦게 인터넷을 통해 퍼지면서 심리적 압박을 느껴 월북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음란반송 출연 등의 과거가 알려져 더 이상 한국 방송 활동을 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임 씨가 재입북을 결심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
재입북이든 납북이든 임 씨의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다만 당분간은 북한에서 임 씨를 ‘남한 비방 강연’을 위해 전면 활용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 다른 탈북민 C 씨는 이에 대해 “예전 같았으면 즉각 처형하거나 감옥으로 보냈겠지만 최근 10년 사이 재입북한 사람들은 아직 북한에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라며 “한국에서 연예 활동을 하다가 돌아와서 비방 강연을 한다면 북한 주민들에게 영향력이 크다. 앞으로도 활용 가치가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대로 북한에 거주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일부 탈북민단체에서는 이번 사건으로 탈북민들을 출연시키는 방송을 폐지할 것을 집단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30대의 젊은 탈북민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거짓 방송으로 북한이나 탈북민에 대한 허위 사실을 알리면서 결국 탈북민사회 전체에까지 피해를 끼치고 있다”라며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고 같은 민족으로 화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북한과 탈북민을 예능 거리로나 소비하는 식의 방송은 지금이라도 당장 폐지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