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섭 사장은 1983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지식경제부 에너지자원실장,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산업정책실장, 산업부 제1차관 등을 거쳐 2016년 11월, 3년 임기의 한수원 사장으로 취임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취임한 백창현 대한석탄공사 사장, 장재원 한국남동발전 사장, 정하황 한국서부발전 사장이 모두 TK(대구·경북) 출신인 데다 정하황 사장을 제외한 3명은 경북고등학교 동문이다.
이관섭 사장은 2011년 자유한국당 전신인 한나라당의 수석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이 사장이 공개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한 적은 없지만 박 전 대통령 정부에서 중용된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낙하산 논란이 있었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크게 주목받진 않았다.
경북 경주에 위치한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사진제공=한국수력원자력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한수원 노동조합(한수원 노조·위원장 김병기)은 이 사장을 지지했다. 이 사장은 정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에 대해 노조와 함께 반대의 뜻을 보였다. 한수원 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큰 틀에서 보면 한수원 노사 모두 원전 해체에 반대하는 입장”이라며 “하지만 이 사장이 정부로부터 거센 압박을 받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노조가 사측에 정부에 대항하라는 요구를 하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지난 13일 한수원은 이사회를 열어 신고리 5·6호기 건설 공사 일시 중단 여부를 결정하려 했다. 그렇지만 이날 노조가 이사진의 한수원 본관 출입을 막아 이사회가 열리지 못했다. 다음날인 14일, 한수원은 경주의 한 호텔에서 기습적으로 이사회를 열어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일시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한수원 노조는 지난 19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에 ‘이사회결의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했다. 노조 관계자는 “신고리 5·6호기는 적법하게 건설 허가를 취득한 국책사업으로 건설을 일시 중지할 수 있는 법률상 근거가 없다”며 “정부의 정책에 동조하기 위해 이사회를 기습적으로 열고 참여 이사 대부분이 쫓기듯 결의에 찬성했다”고 전했다.
이 일로 한수원 내부에서 이 사장의 신뢰도는 떨어졌다. 앞의 한수원 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이사회가 열리면 일시 중단 결정이 날 것이 뻔했기에 노조와 이사진이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이 사장이 정부에 ‘노조 때문에 이사회를 열지 못했다’고 핑계를 댈 수 있게끔 만들려 했다”며 “하지만 기습 이사회를 개최하면서 노조가 이 사장과 이사진의 본심에 의심을 품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내부의 신뢰를 잃은 동시에 외부의 견제도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일 백운규 산업부 장관은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이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한수원이 특정한 결론을 유도하면 안 되니 관리·감독을 하라”는 요청에 “알겠다”고 답했다.
지난 18일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사무소에서 열린 이관섭 한수원 사장 등 간부진과 서생면 주민들의 간담회에서 이 사장이 신고리 5·6호기 건설 일시 중단 결정에 대한 주민의 항의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이 사장은 “영구 중단으로 결론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정부는 7월 안에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3개월간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영구 중단할지 공사를 재개할지 여부를 논의한다. 최종 판단은 시민배심원단이 내리며 배심원 구성과 의사결정 방식 등은 공론화위원회가 결정한다. 즉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은 이 사장이 아닌 공론화위원회와 배심원단의 손에 달린 것이다. 한수원 관계자는 “이 사장이 노력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향후 한수원이 어떻게 행동할지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다”고 전했다.
정권 교체 후 공공기관 수장이 바뀌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다. 한수원도 예외는 아니다. 2013년 6월 박근혜 정부는 김균섭 전 한수원 사장을 부품 시험성적서 위조 혐의로 취임 1년 만에 면직 처리했다. 이 사장 역시 임기가 2년 이상 남았지만 정부와 엇박자 행보를 보이고 있어 남은 임기를 장담할 수 없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지역인 울주군 서생면 주민들은 한수원 이사회 개최 후 이 사장 퇴진 운동을 벌이고 있다. 원전 해체를 추진하는 정부뿐 아니라 해체를 반대하는 한수원 노조와 지역민들에게 인심을 잃은 셈이다. 양쪽에서 모두 외면받는 처지가 된 이 사장이 앞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지 주목된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
문재인 정부, 공공기관장 물갈이 시작?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공기관 수장이 교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정권 초기 새 정부의 정책을 효율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효과를 얻기 위해서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가 남은 기관장을 인위적으로 교체하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들어 일부 공공기관장이 사퇴해 분위기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지난 6월 16일 김성주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임기 약 3개월을 남겨두고 사임했다. 지난 7일에는 임기가 6개월 남은 김학송 전 한국도로공사 사장이 사퇴했다. 한국도로공사 관계자는 “김 전 사장이 새 정부가 출범한 직후부터 각종 비상경영회의를 통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하며 퇴임 시기를 조율해왔다”며 “(김 전 사장은) 한국도로협회장을 겸임하고 있기 때문에 26회 도로의 날 기념식이 있는 7일 사퇴를 표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이승훈 전 한국가스공사 사장이 사퇴했다. 임기가 1년이나 남은 상태였다. 한국가스공사 관계자는 “개인적인 일이라 구체적인 사퇴 이유는 모른다”고 밝혔다. 김 전 총재, 김 전 사장, 이 전 사장의 공통점은 대표적인 친박 인사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또 지난 20일 충북 청주지검 충주지청은 한국가스안전공사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감사원이 최근 가스안전공사 사원 채용 과정에서 최종 면접자 순위가 조작된 사실을 파악해 수사를 의뢰한 것. 대구 출신의 박기동 가스안전공사 사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12월 3년 임기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검찰은 박 사장의 부적절한 개입이 있었는지 여부를 확인 중이며 개입이 확인되면 박 사장의 자리도 위태로울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추가로 일부 공공기관 수장을 교체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문 대통령이 노동자의 의견을 중시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양대노총 공공부문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지난 18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회관에서 ‘공공대개혁을 위한 적폐기관장 사퇴촉구 1차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날 박해철 한국노총 전국공공산업노동조합총연맹(공공노련) 위원장은 “기관장들이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지금이라도 즉시 사퇴하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공대위가 발표한 10명의 적폐기관장 명단에는 친박 인사로 분류되는 홍순만 한국철도공사 사장, 김옥이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등이 포함돼 있다. [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