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15 특별사면으로 출소해 심경을 밝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손에 든 성경이 눈에 띈다. 임준선 기자
서울가정법원에 접수된 이번 소장에는 재산분할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혼 조정 신청을 통해 최 회장은 아내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의 이혼 의사를 확인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노 관장이 이혼에 동의하면 위자료 지급이나 재산분할 등의 논의가 뒤따를 것이고, 이혼을 거부하면 조정이 불성립됨과 동시에 정식재판을 거쳐 이혼 가능 여부를 다툰다. 노 관장은 그간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이혼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가사 전문 변호사인 양연순 변호사는 “재판상 이혼이 인정되려면 상대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부정행위를 했다거나 학대 같은 부당행위, 3년 이상 생사불명 등 이혼사유가 있어야 한다”며 “이혼사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혼사유를 스스로 일으킨 장본인을 유책배우자라고 하는데, 법원은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를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2015년 12월 <세계일보>를 통해 동거인 김 씨와 혼외자의 존재를 고백한 바 있다.
다만 양 변호사는 “상대 배우자가 보복의 감정을 갖고 혼인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가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노 관장은 2015년 8·15 특별사면을 앞두고 청와대에 남편의 사면을 반대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는 법원 판단에 따라 이혼 사유가 될 수 있다.
앞서 노 관장은 최 회장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차례 설득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SK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지난해 3월 최 회장이 SK㈜ 주주총회를 통해 등기이사로 경영에 복귀했는데 당시 노 관장이 남편 몰래 외곽에서 일부 주주들과 접촉한 것으로 안다”며 “실제 남편이 잡음 없이 경영권을 회복했음에도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자 그 일에 굉장히 낙심하고, 주변에 괴로움을 토로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 회장과 가까운 인사들의 주장은 다르다. 노 관장이 회사 경영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바가 없고, 최 회장과 10년 가까이 사실상 별거 생활을 지속하면서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계 안팎에선 최 회장이 측근인 은 아무개 씨를 중용하면서 노 관장과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는 말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임우재 전 고문과 노소영 관장의 결정적인 차이는 회사 내 직책의 유무와 경영에 대한 기여”라며 “설혹 최 회장의 아내로서 경영 기여가 일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SK는 최 회장 혼자 키운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임직원의 인풋이 들어가 성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일요신문 DB
양 변호사에 따르면 이혼 시 재산분할 대상은 원칙적으로 혼인 중인 부부가 협력해 이룩한 재산에 한정된다. 최 회장은 이 사장과 마찬가지로 재산 95% 이상을 주식 형태로 갖고 있고, 이마저도 선친인 고 최종현 회장에게 상속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1999년 기준 최 회장은 1360억 원가량의 회사 주식을 부친에게 상속받으면서 730억 원의 상속세를 납부했다. 현재 최 회장이 보유한 주식 가치는 약 4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최 회장이 상속받은 주식 가운데 SK텔레콤 주식은 단 한 주도 없었다. SK텔레콤은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재산분할 시 첨예한 법리 다툼이 예고되는 회사다. 재계에 따르면 노 관장을 옹호하는 쪽은 SK가 4대 재벌로 성장한 배경에 한국이동통신 인수가 있고, 이 과정에 노 관장 부친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배려가 있었으므로 경영에 대한 기여가 적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 1980년대 SK가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큰 유공(현 SK이노베이션)을 인수할 수 있었던 배경에 정치적인 힘이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앞의 재계 관계자는 “유공 인수는 전두환 정부 때 있었던 일로 노 전 대통령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며, 한국이동통신은 노태우 정부 당시 특혜 의혹이 불거져 사업권을 반납했다가 김영삼 정부 들어 다시 입찰을 거쳐 정당하게 매입한 회사”라고 주장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재산 증식에 대한 기여도를 판단할 때 정치적인 영향력을 따지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전직 SK 관계자는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SK텔레콤을 인수하면서 최 회장의 개인회사나 다름없는 대한텔레콤을 만들어 부를 증식한 측면이 있다”며 “SK텔레콤의 가공할 현금 동원 능력이 SK가 성장하는 ‘시드머니’가 됐다”고 주장했다. 실제 최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한 직후(1998~1999년) 언론보도 등을 보면 그룹 지배구조 최상위에 있던 SK상사의 최대주주는 SK텔레콤(4.06%)이다. 최 회장과 부친이 보유한 지분율의 합은 3.1%에 불과했고, 나머지 친족 보유 지분도 2.2%에 그쳤다. 즉 그룹 지배구조 핵심에 SK텔레콤이 있던 셈이다. 최 회장은 SK상사를 통해 SK㈜를 지배했고, SK㈜는 다시 SK텔레콤을 지배하는 순환출자 구조였다. 만약 당시 SK텔레콤이 가진 SK상사 지분 4.06%에 대한 일부 권리가 노 관장에게도 있다면 재산분할의 변수가 될 수 있다.
다만 앞의 관계자는 “1990년대 후반 노 관장이 SK텔레콤에 ‘어떤 사업’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는데 윗선에서 단칼에 거절해 그 이유를 물으니 ‘오너’가 노 관장과 내외하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즉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노 관장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 소송에서 또 다른 변수로 꼽히는 것은 동거인 김 씨가 보유한 재산이다. 앞서 금융·과세당국은 최 회장이 김 씨에게 재산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증여(또는 양도)한 것은 없는지에 대해 조사했으나 뚜렷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두 사람이 10년째 사실혼 관계인 것을 근거로 김 씨의 해외 재산 가운데 일부가 최 회장이 기여한 것일 수도 있다는 추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SK 측은 “오너 개인사에 대해선 말할 것이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