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목사가 됐어요?”
나도 그의 삶을 알고 싶어 물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죠. 어머니는 남산 올라가는 길모퉁이에서 노동자들에게 막걸리를 잔술로 파는 노점상부터 시작해서 안한 게 없었죠. 그래도 저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서울대에 두 번이나 낙방하는 바람에 신학대를 가게 됐어요.”
운명이 그를 하나님에게 끌고 간 것 같았다.
“그래 신학을 하면서 신(神)을 만났나요?”
“제가 젊은 날 이십일을 금식을 해 본 적이 있어요. 열흘쯤 굶으니까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이 빠져나오는데 어떻게 많은지 몰라요. 그 다음부터는 아무 생각이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로 들어가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날짜가 지나가니까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도 없어져요. 그때 사람은 환희 속에서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이제 저도 이제 언제 죽음의 천사가 찾아올지 모르는 나이인데 그 손님이 오시는 눈치를 채면 바로 금식에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평소같이 살다가 죽을 겁니다. 병원에 가서 온갖 호스를 몸에 꽂고 생명을 연장할 필요 없어요. 직접 신을 보거나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안 셈입니다.”
“어머니에 이어서 스스로도 가난을 택한 것 같은데 어느 정도였나요?”
“나이를 먹고 어머니 묘를 이장하라는 공고가 붙었을 때였어요. 이장을 하는데 몇 백 만원이 드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가서 직접 어머니의 묘를 파헤쳐 어머니의 뼈를 수습했어요. 그걸 화장해서 지금 내가 사는 주공아파트 창문에서 바라다 보이는 나무 밑에 뿌렸어요. 신도도 교회도 돈도 없는 목사지만 대신 하나님이 근육은 튼튼하게 해 주셨죠. 그리고 세상이 참 좋아졌습니다. 정부에서 노인이라고 생활지원금도 줍니다. 동네에 산책로도 생기고 도서관도 생겼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가면 책도 여러 권 거저 빌려줍니다. 이런 천국 같은 세상을 어린 시절은 상상도 못했어요. 하나님이 정부를 통해 만나를 내려주시는 거죠.”
“그래서 목회자로서의 삶은 행복했습니까?”
“젊어서는 전도사로 항구에서 선원들을 상대했습니다. 평생 번듯한 내 교회를 가지고 목회를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제가 말로 하는 설교보다 글과 외국어에 흥미가 있어서 글로 책으로 진리를 전했죠. 지금도 열일곱평짜리 낡은 주공아파트에서 잡지를 만들고 있죠. 보석 같은 성자들을 세상에 알리는 글을 씁니다. 소수지만 내 글에 맛을 들인 독자들이 늘어가는 걸 보면 행복해요.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도 충분해요. 목사님들을 만나 사진 찍고 인터뷰를 할 때 작은 헌금이 든 봉투를 주는 적도 있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받습니다. 그 돈을 모아 내가 죽은 후에 우리 집사람이 살 수 있도록 연금이나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가난해도 그는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진짜 부자였다. 약한 노인이지만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아는 그는 진짜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