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적으로 치러진 지난 5월 9일 장미대선에다 당선 직후 인수위원회 가동도 없이 곧바로 국정 운영에 들어가야 했던 문 대통령으로서는 그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가였을 터. 하지만 휴가 출발 직전 북한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미사일 도발이 일어나면서 문 대통령 휴가는 글자 그대로 ‘무늬만 휴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
# 야당, 일제히 십자포화
강원도 평창에 들렀다가 경남 진해로 여름휴가를 떠난 문 대통령은 뒤통수가 화끈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하다. 야당을 비롯해 많은 언론이 “북한 미사일 도발로 휴전 이후 최대의 안보 위기가 닥쳤는데 한가하게 휴가를 갔다”는 비난을 쏟아낸 탓이다. “국군 통수권자가 맞느냐” “위기가 닥쳤는데 이러고도 공무원이냐” 등등의 십자포화가 쏟아졌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8월 2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좌파세력의 안보 무능이 현실화되는 것 아닌지 큰 우려를 갖고 있다. 한반도 빅딜설, 심지어 8월 위기설이 국제적으로 나오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홍문표 사무총장도 “대통령이 휴가를 가니 청와대 참모 행정관들도 줄줄이 휴가를 가서 청와대가 지금 텅 빈 상태다. 현장에 있어야 할 시기에 현장에서 이탈하면 그것은 장수가 아니다”라고 했다.
박주선 국민의당 비대위원장도 2일 “안보까지 휴가 보낸 문재인 정부의 무개념 국정 운영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김정화 국민의당 비대위원은 “미사일 실험 이후 미국 여론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등산하는 문 대통령은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 안보위기라는 풍전등화 상황에서 오대산 등산 타임은 빈약한 정치 행보”라고 질타했다.
이혜훈 바른정당 대표는 “대한민국 안보는 휴가 중”이라며 현 상황을 비판했고,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 역시 “이런 정부를 믿고 안보를 맡겨도 되는지 걱정”이라고 지적했다. 야 3당이 문 대통령 휴가를 두고 일제히 총공격에 나선 셈이다.
# 발끈한 청와대와 여당
야당의 공세 수위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이를 그대로 실은 언론보도 사설까지 비판적 목소리로 이어지자 청와대는 발끈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북한이 도발했다고 대통령이 휴가를 안 가면 북에 끌려 다니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대응체계를 잘 갖추느냐 인데 언제든 군 통수권이 발동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놨다”고 강조했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은) 조기 복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공지 메시지를 출입기자단에게 보내 복귀설 조기 차단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문 대통령이 2일 휴가기간 중 휴가지인 진해에서 리아미잘드 리아꾸두 인도네시아 국방장관을 접견한 것과 관련, “가장 시급한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는 미루고 인도네시아 국방장관을 만난 이유는 뭐냐”고 이날 기자들이 묻자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미국과는) 매일(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Daily Base’라고 표현했다) 대화가 이뤄지고 있으며 향후 조치에 대해 충분히 논의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과는 의제가 협의되는 대로 (전화통화가) 이뤄질 것이다. 휴가라서 통화를 안 한다는 차원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여당도 적극적으로 청와대 엄호 사격을 하며 방어에 나섰다.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구두논평을 통해 “문 대통령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 징후를 사전에 보고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상황을 면밀하게 판단한 뒤 휴가를 떠난 것”이라고 했다. 강 대변인은 “휴가 중에도 북한의 동향이나 주변국의 움직임 등을 면밀히 보고받고 점검하고 있다. 야당이 휴가를 중단해야 한다며 호들갑스럽게 요구할 상황이 아니다. 국군통수권자가 정말 휴가를 중단한다면 그것은 정말 비상상황이 발생했다는 의미다. 특별한 이유 없이 문 대통령이 휴가지에서 복귀하면, 그 자체로 국민에게 불필요한 안보 불안감을 야기할 수 있다”라고 했다.
# 쌓여 있는 숙제들
‘휴가 같지 않은 휴가’를 보낸 문 대통령의 책상 위에는 난제가 잔뜩 쌓여 있다. 대선을 치르고 청와대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문 대통령은 소탈한 소통 행보를 보이며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사상 최고 수준의 지지율 고공행진을 보이기도 했다. 인수위도 없이 청와대에 들어왔지만 “잘한다”는 칭찬이 잇따랐다. 심지어 야당도 박수를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취임 100일을 앞둔 시점에서 어려운 문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장 무거운 숙제는 북한 미사일 도발이다. 북한이 곧 6차 핵실험을 하면서 무기화된 핵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보란 듯이 선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은 미국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ICBM급 ‘화성-14’ 2차 발사를 7월말 기습적으로 했다.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둔 미사일을 개발했다는 것을 과시한 셈이다.
문 대통령이 디자인했던 한반도 평화 구축 그림에도 큰 구멍이 났다. 문 대통령은 ‘베를린 구상’을 통해 우리가 주도권을 잡은 상황에서 압박·제재와 동시에 대화의 문을 여는 ‘투 트랙’ 전략 도입을 시도했지만 북한은 대꾸는커녕 대한민국을 완전히 따돌렸다. 그리고 미국 본토를 겨냥한 미사일을 연일 시험 발사하면서 “미국 빨리 나오라우!”를 외치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하면서 중국이 한반도 평화 중재자로서 북한에 대해 역할을 전혀 하지 않는 점도 문재인정부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중이다. 야당이 ‘코리아 패싱’ 현상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이 북한 문제를 놓고 큰 틀의 담판을 짓는 이른바 ‘빅딜론’이 제기되는 것도 문재인정부로서는 엄청난 부담이다. 한반도 문제의 최대 당사자인 한국이 북한 문제 해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처럼 비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대한민국이 주도권을 잡는다는 이른바 ‘한반도 운전자론’을 들고 나온 문재인정부로서는 그야말로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 문제를 안았다.
이런 와중에 미국이 북한의 현실적 위협을 감안, 한국을 배제한 채 중국과 협상해 ‘북한 체제 보장→북한 핵 포기→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주한 미군 철수’라는 빅딜을 할 수 있다는 우려도 끊임없이 나온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 영구 분단이라는 민족사적 재앙이 찾아올 수 있다.
2일 정부·여당이 내놓은 부동산 대책과 이른바 ‘부자 증세’를 위한 세법 개정안 처리 등 민생 문제도 넘어야 할 산이다. 정치권에서는 부동산 가격 상승세를 막지 못한다면 취임 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70%대 지지율을 떠받치던 지지층 일부가 떨어져 나갈 가능성을 제기한다. 세법 개정안도 국회에서 통과시켜야하는데 야당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여 큰 갈등이 점쳐진다. 이밖에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의 완전 중단 여부를 공론화위원회 결정에 따르겠다고 하는 등 ‘탈원전 정책 추진’도 결코 쉽지 않은 숙제다.
# 문 대통령 숨고르기 나설까
정치권 안팎에선 문 대통령이 취임 직후 보여줬던 국정 수행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탈원전을 실행하기 위한 이른바 원전 셧다운, 최저임금 1만 원 추진, 비정규직 전면 철폐, 고소득자 중과세 등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속도전으로 치고나왔던 여러 가지 국정과제에 대한 숨고르기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고위 공직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5년 단임제라는 한계를 대통령들이 못 본다. 취임하기 전에 5년 단임제 전직 대통령이 왜 실패했는지 뻔히 보며 비판해놓고 취임하고 나서는 자신이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간다. 취임 초에 국가 대개조, 국정혁명 등을 내세우며 완전히 판을 바꿔보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되나.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 지금은 국회의 힘이 세져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이 더 적어졌다. 문 대통령도 ‘청와대가 모든 것을 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안보와 개헌,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경제 체제 구축 등 2~3가지 정도 과제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퇴임할 때 박수 받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 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