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내게 그의 미술은 단순한 선, 정겨운 풍경이다. 그의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기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이 있는 그의 세계를 쉽게 흉내낼 수는 없겠다. 그는 ‘자유’를 사랑했던 것 같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을 보며 생각한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그리는 일은 단순하지 않은 거구나! 피카소도 말했다. 환갑이 넘어서야 비로소 어린아이처럼 자유롭게 그릴 수 있었다고.
이번 전시회에서 내 시선을 끌었던 작품 중의 하나는 아내의 초상을 그린 ‘진진묘’였다. 아마 진진묘는 그의 아내의 법명이었던 모양이다. ‘진진묘’ 속 여인은 오등신에 얼굴만 크다. 그런데도 누구나 천하제일 미(美)로 느낀다.
그 그림을 보는데 왜 마네킹이 오버랩되었을까. 이 무더위 속에서 시위를 벌인 여성단체 회원들이 문제는 마네킹이라며 마네킹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았다. 작은 얼굴, 키 178cm, 허리 61cm의 8등신. 그런 환자 같은 마네킹의 몸에 옷을 입혀 팔며, 큰 사이즈를 일부러 만들지 않는 상술로서 일반인들의 기를 팍팍 죽이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폭로였다. 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77 혹은 88 사이즈를 입어도 되는 자연스러운 우리의 몸이 개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그것은 분명 폭력이다.
5등신의 ‘진진묘’가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을 들여다보며 그림의 여인처럼 눈을 감아본다. 저 여인이 저리도 아름다운 건 눈코입의 생김새나 키 때문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표정에서 자태에서 온다. 누구에게도 잘 보이려 하지 않고 잘 보이지 않으려 하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 존재하는 여인, 선정에 든 것 같은 그 여인은 관음의 현현인 것이다.
아내를 관음보살로 느끼는 남자, 그 남자 속에는 관음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니 그의 작품 ‘새’가 그의 자화상 같다. 초승달이 뜬 하늘로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의 밤은 어둡지 않다. 밤도 자유로운 새는 달을 향해 비상한다. 나도 그렇게 비상하고 싶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