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 선생
최재형 선생 일가는 아홉 살이 되던 해,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로 이주했다. 가뭄과 기근 탓이었다. 지신허는 지금의 크라스키노 인근이다.
비슷한 처지의 한인들이 모여 살던 연해주 역시 만만찮은 곳이었다. 최 선생 일가를 비롯해 이주 한인들은 그곳에서 ‘자작’을 할 수 있었지만, 땅은 척박했다. 최재형 선생은 12세가 되던 해 주린 배를 움켜잡고 가출하기에 이른다. 1871년의 일이다.
그의 눈에 광활한 연해주 앞 바다가 들어왔다. 항구에 정박한 거대한 상선도 함께.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처지 속에서 바다는 기회였다. 만약 저 상선을 타고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최재형 선생은 그렇게 몰래 상선에 올랐다. 운이 좋았다. 그는 영리한 두뇌와 능숙한 러시아어 실력으로 상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급기야 선장의 배려로 ‘양자’ 취급을 받기에 이른다. 그는 6년이란 적잖은 시간 동안 선원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전 세계 곳곳을 돌며 견문을 넓힌다.
연해주로 돌아와서도 그는 선장 부부의 배려 덕에 러시아 근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어와 한국어 모두 능통하게 구사할 줄 알았고, 게다가 근대 교육까지 섭렵한 인재였다. 그 덕에 그는 연해주 주둔 러시아 군의 ‘얀치헤-라즈돌리노예’ 군사도로 공사 전담 통역사로 발탁됐다. 이 공사에는 당시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 건설 노동자들이 대거 투입됐다.
수완이 좋았던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군과 연을 맺은 이후 극동함대사령부 식료품 납품권을 따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 훗날 정식으로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최재형 선생은 1893년 러시아 지방 도헌(지금의 군수에 해당)에 임명되기에 이른다. 흙수저였던 그의 삶은 러시아 사회 정착 후 순식간에 ‘상위 1%‘가 된 셈이었다.
최재형 선생은 그렇게 살면 됐다. 거머쥔 부와 명예 속에서 편하게 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국땅에서 핍박받던 한인들에게 향했다. 온갖 핍박을 받던 한인 노동자를 비호했으며 계몽운동과 교육운동에 힘썼다. 연해주 한인마을 곳곳에 학교를 설립했고, 도헌 봉급을 통해 장학 사업을 꾀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최재형 선생은 당시 조선의 현실과 마주했다. 이미 러시아인이 된 그였지만, 조국의 어두운 현실을 저버릴 수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박영효로부터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전해 듣는다. 그리곤 무관 출신 이범윤과 협력해 국민회를 조직하고, 의병을 모집해 본격적인 항일 지사의 길을 걸었다.
최재형 선생은 주재지인 연해주를 중심으로 축적한 자신의 재산을 앞세워 문화적으로, 군사적으로 일제에 대항해 나갔다. 1908년 동의회를 발족해 의병활동을 진두지휘하는 한편, <대동공보>를 발행해 글로써 일제를 격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그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업적 중 하나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의거를 지원했다는 부분이다.
정재진 광복회 서울지부장은 “안중근 의사가 안중근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만든 모든 뒷배는 최재형 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까지 기거했던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택 외관.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이 부분에 대해선 이미 <일요신문>이 제1215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러시아 연해주 대장정’ 연재를 통해 다룬 바 있다. 연재 당시 기자는 최재형 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이토 저격을 앞두고 모의 연습을 진행했던 러시아 우수리스크 장교공원 발자취를 직접 따라갔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은 최재형 선생의 기획이고 지원이었다. 동의회를 통해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가족끼리도 허물없이 지낼 만큼 가까웠다. 이토 저격 후 붙잡힌 안 의사의 변호사를 선임한 것 역시 최재형 선생의 몫이었다.
한 마디로 윤봉길 의사 뒤에 김구 선생의 기획과 지원이 있었다면 안중근 의사 뒤에는 최재형 선생의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대목이 있다. 그가 1919년 성립된 임시정부에 적잖은 물적 지원에 나섰다는 점이다. 그가 여러 이유로 거절하긴 했지만, 훗날 임시정부가 그를 초대 재무총장으로 임명한 배경이기도 하다. 즉, 최재형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막대한 역할을 한 인물인 셈이다.
최재형 선생은 1920년 4월 7일, 소비에트 군과 한인 의병은 물론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남긴 일제의 4월 참변 당시 총살로 삶을 마감했다.
최재형 선생이 우리 항일투쟁사에 차지하는 비중과 업적은 막대하다. 하지만 그의 삶과 업적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그가 오래전 조선을 떠난 러시아 국적자라는 점, 또한 소비에트 군과 연계해 일제와 맞섰다는 점, 그의 일가 후손들이 여전히 한국이 아닌 러시아 본토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의 재조명을 가로 막아왔다는 평가다.
일제에 맞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항일 투쟁을 이끈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97주기 추모식이 사단법인 최재형기념고려인지원사업회 주최로 지난 4월 7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불행 중 다행으로 최근에서야 최재형 선생의 업적이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다. 2015년 7월 국내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최재형기념고려인지원사업회’가 설립됐으며 이와 관련한 각종 사업이 진행 중이다. 부를 일군 실업가 출신으로 자신의 재산과 몸까지 조국에 바친 그의 뜻을 받들겠다는 기업인들의 바람에서 비롯됐다.
최재형 선생의 재조명은 지금 시대상과도 맞닿아 있다. 앞서의 정재진 지부장은 “최재형 선생이야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며 반드시 부각되어야 하는 인물”이라며 “이회영 선생이 삼한갑족의 자부심을 지켰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라면 최재형 선생은 노비와 기생 아들 출신으로서 지금 ‘흙수저’들의 표상이 되는 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재진 지부장은 “지금도 숱한 애국지사들이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또 활동을 증명할 사료가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라며 “이제는 그러한 분들이 인정받고 부각되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