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가슴 아픈 기록만은 아니다. 고영표는 올 시즌 벌써 21경기에 선발 등판했다. 2015년 데뷔 후 처음으로 100이닝을 넘겼다. 올 시즌 소화한 122⅓이닝은 2015년(57이닝)과 2016년(56⅓이닝) 이닝 수의 두 배에 가깝다. 늘어나는 패전 수와 상관없이 선발 로테이션을 계속 지켰다. 그만큼 팀이 믿고 의지하는 투수로 성장했다는 의미다.
많이 진 팀은 확실히 약하다. 그러나 많이 진 투수가 무조건 약한 투수는 아니다. 많이 지려면 그만큼 많은 경기에서 많은 공을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통산 최다승 투수인 송진우가 통산 최다패 기록도 함께 보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통산 363승245패로 메이저리그 역대 왼손 최다승 투수로 남아 있는 게일로드 페리는 과거 미국의회 연설에서 “야구는 실패의 게임”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고영표 선수. 사진 출처 : kt wiz 홈페이지
# ‘불멸의 최다패’ 장명부의 기록
실제로 한 시즌 최다패 투수들 가운데는 소속팀 에이스나 2선발로 활약했던 선수가 많다. 역대 최다패 기록은 1985년 청보에서 뛴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가 갖고 있다. 무려 25패. 투수들이 선발과 불펜 구분 없이 마구잡이로 등판하던 시절이라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운 숫자다. ‘불멸의 기록’으로 통한다.
장명부는 25패를 당하기 불과 2년 전인 1983년 삼미에서 역시 전설의 기록인 한 시즌 30승을 올린 투수다. 그러나 장명부와 함께 원투펀치를 이루던 임호균이 1984년 롯데로 이적하면서 홀로 책임져야 할 몫이 너무 많아졌다. 게다가 팀도 너무 약했다. 결국 그해 삼미에서 역대 최초의 20패를 안았다.
1985년 후기 리그부터는 청보로 팀이 넘어갔다. 장명부는 결국 그해 청보의 70패의 가운데 25패를 떠안았다. 그러나 반대로 팀의 39승 가운데 11승도 함께 책임진 비운의 에이스이기도 했다. 이후 한 시즌 20패를 넘어선 투수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장명부는 이듬해인 1986년에도 빙그레에서 18패를 당한 뒤 4년에 걸친 한국 프로야구 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단 4시즌 동안 그가 기록한 패전은 총 79패였다.
# 프로야구 초창기 최다패 투수들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장명부 다음으로 많은 패전을 당한 투수는 롯데 노상수였다. 프로 원년인 1982년 삼미 김재현과 함께 시즌 최다패 경쟁을 펼쳤다. 김재현은 평균자책점이 6점대였지만, 노상수는 달랐다. 평균자책점 2.94를 올리고도 19패를 당하는 불운을 겪어 역사에 남았다. 역시 팀 전력 탓이 컸다. 롯데는 그해 꼴찌인 삼미의 바로 윗 순위였다.
OB 장호연도 신인이던 1983년을 17패로 출발했다. 신인으로는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나서 MBC를 상대로 완봉승까지 올렸지만, 승수(6승)보다 패수를 더 많이 쌓은 채 첫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렇게 패하면서 쌓은 경험이 ‘역대급’ 기교파 투수 장호연의 밑거름이 됐다. 장호연은 그 후 네 시즌 동안 두 자릿수 승수를 올리면서 두 자릿수 패전도 네 차례 기록했다. 개인 한 시즌 최다승인 16승(1992년)보다 데뷔 첫 해 당한 개인 한 시즌 최다패가 하나 더 많았다. 결국 장호연은 109승110패로 승패 마진 ‘-1’의 통산 성적을 남기고 은퇴했다.
이뿐 아니다. 롯데 전설의 에이스 최동원조차 패배의 그림자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1983년에 장호연 다음으로 많은 16패(9승)를 당했다. 2.89의 평균자책점을 올린 투수치고는 너무 많이 졌다. 현재 한화 감독대행을 맡고 있는 빙그레 이상군도 입단 첫 해인 1986년에는 비운의 투수였다. 신인이 평균자책점 2.63을 기록하며 팀의 2선발로 자리 잡는 실력을 과시했지만, 창단 2년 차인 팀 전력이 너무 약해 17패(12승)를 떠안았다.
# 구대성·정민태·윤석민도 피하지 못한 불운
1990년대 들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한 시즌 최다패 경험자들의 명단이 무척 화려하다. 1995년은 한화 구대성과 태평양 정민태가 나란히 14패로 고개를 숙인 시즌이었다. 한양대 1년 선후배 사이인 두 스타플레이어가 동시에 시즌 최다패 1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 결과 역시 ‘부진’의 산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구대성은 그해 한화 주전 마무리로 활약하는 한편 12번 선발 투수로 등판해 6번을 완투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해 성적이 4승 14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은 3.54였다. 그리고 구대성과 정민태는 이듬해 나란히 다시 날개를 폈다. 구대성이 18승, 정민태가 현대에서 15승을 각각 올렸다. 구대성은 그해 정규 시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윤석민 선수.
# 최다패 딛고 ‘반전’ 일궈야 가치 있다
앞서 언급한 시즌 최다패 투수들이 결국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유는 이들이 패전을 밑거름 삼아 극적인 반전을 이뤘기 때문이다. 1983년 16패 투수인 최동원은 이듬해 무려 27승을 따낸 뒤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홀로 품에 안으며 롯데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야구팬들은 ‘1983년 16패 투수’가 아닌 ‘1984년 27승 투수’로 최동원을 기억한다.
윤석민 역시 18패 이듬해인 2008년 14승을 올리며 데뷔 첫 두 자릿수 승수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해 평균자책점 1위(2.33)도 윤석민의 차지였다. 투수로서 한 단계 도약했다. 그는 2010년에도 좀처럼 승운이 따르지 않고 부상까지 겹치면서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그러나 2011년 다시 17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하면서 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178개)·승률(0.773) 4관왕에 올랐다. 1991년 해태 선동열 이후 20년 년 만에 나온 투수 4관왕. 정규시즌 MVP로도 선정됐다.
꼭 젊은 선수들에게만 해당 되는 얘기도 아니다. 1998년에는 한화 이상목이 17패, 2004년에는 한화 문동환이 15패로 각각 그해 최다패 투수로 기록됐다. 그러나 이상목은 이듬해 14승을 올리면서 한화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조했다. 문동환은 2005년 10승으로 반등한 데 이어 2006년 14승으로 재기의 날개를 폈다. 특히 2006년에는 갓 데뷔한 고졸 신인 류현진과 원투펀치를 이뤄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함께 이끌었다.
외국인 투수들도 의미 있는 역사를 썼다. 두산 출신인 다니엘 리오스가 대표적이다. 리오스는 2005년 12패로 아쉬움을 삼킨 뒤 2006년 16패를 쌓아 올리며 2년 연속 시즌 최다패 투수로 기록됐다. 그러나 2007년에 확실한 반전 드라마를 썼다. 무려 22승으로 역대 외국인 투수 한 시즌 최다 승리 기록을 세웠고, 평균자책점(2.07)도 1위에 올랐다. 외국인 선수라는 핸디캡을 딛고 시즌 MVP로도 선정됐다. 22승은 지난해 두산 더스틴 니퍼트가 타이를 이루기 전까지 10년간 단독 최다 기록으로 유지됐다. 현재 넥센 1군 투수코치를 맡고 있는 브랜든 나이트 역시 선수 시절인 2011년 넥센에서 15패를 당했다. 그러나 2012년 무려 208⅔이닝을 던지면서 평균자책점(2.20) 1위에 올라 리그 정상급 에이스로 발돋움했다.
올 시즌 고영표가 얼마나 더 많은 패전을 쌓을지, 혹은 또 다른 선수가 고영표를 추월해 2017년의 최다패 투수로 기록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1승도, 1패도 결국 경기에 출전한 투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점이다. 김원형(현 롯데 수석코치)은 1991년 갓 창단한 쌍방울에 고졸 신인으로 입단했다. 팀 사정상 프로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다. 첫 승을 따낼 때까지는 좋았다. 내리 9연패가 이어졌다. 결국 “2군으로 내려가고 싶다”고 자청까지 했다. 그러나 당시 사령탑인 김인식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김원형을 선발 투수로 기용했다. 결국 김원형은 그해 8월 14일 당대 최고 투수인 해태 선동열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1-0 승리를 따냈다. 역대 최연소 완봉승 기록이었다. 김원형은 그 후 5승을 더 추가했고, 딱 2번만 더 졌다. 통산 100승 투수로 반열에도 올랐다. 승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투수에게는 패전도 값진 교과서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시즌 19패 ‘동네북’ 본더맨의 반전 드라마 투수의 승리와 패전은 혼자 힘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9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도 타선이 점수를 뽑지 못하면 패전 투수가 된다. 반대로 5이닝 동안 10점을 내줘도 팀이 11점을 올리면 승리 투수가 될 수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행운과 불운이 늘 교차한다. 메이저리그에도 비운의 투수들이 수두룩했다. 특히 초창기에는 2~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도 20패를 넘긴 투수들이 쏟아졌다. 1901년 더미 테일러는 18승 27패 평균자책점 3.18, 1905년 빅 윌스는 12승 29패 평균자책점 3.20, 1910년 조지 벨은 10승 27패 평균자책점 2.64를 각각 기록했을 정도다. 현대 야구에선 ‘20패 투수’가 쉽게 나오지 않는다. 투수 분업화가 자리 잡아 선발 투수들이 한 시즌에 나설 수 있는 경기 수가 한정돼 있다. 실제로 1980년 오클랜드 소속이던 브라이언 킹맨이 8승 20패(평균자책점 3.83)를 기록한 뒤 한동안 20패 투수의 맥이 끊겼다. 2003년 디트로이트 투수 마이크 매로스가 평균자책점 5.73으로 9승 21패를 기록한 게 20년 만에 처음 나온 투수 20패 기록이었다. 제레미 본더맨. 사진 출처 : 제레미 본더맨 페이스북 디트로이트의 암흑기였다. 메이저리그의 ‘동네북’으로 통했다. 개막 9연패로 2003시즌을 출발해 결국 아메리칸리그 한 시즌 역대 최다인 119패를 당했다. 그렇게 많이 지는 동안 43승밖에 못 올렸으니 승률은 고작 0.265. 마로스가 21번이나 질 만했다. 본더맨은 그해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2001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전체 26순위)로 오클랜드에 지명된 뒤 2002년 8월 삼각 트레이드로 디트로이트 유니폼을 입었고, 1년 만에 빅리그 무대를 밟았다. 2003년 개막전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될 만큼 기대를 많이 받았다. 본더맨의 부푼 꿈은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기량은 나쁘지 않았다. 15경기에서 6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그러나 5승을 올리는 데 그쳤다. 19패 가운데 8번은 퀄리티스타트에 성공하고도 패전을 안은 경우였다. 데뷔 첫 해부터 두 자릿수 승수를 올릴 만한 피칭을 했지만, 도리어 매로스와 함께 동반 20패 투수로 남을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당시 앨런 트란멜 감독과 밥 클럭 투수코치는 신인이었던 본더맨의 투구 이닝을 170이닝으로 제한했다. 이어 시즌 말미에는 불펜 투수로 기용해 더 이상의 패전 추가를 막았다. 만약 매로스와 본더맨이 동반 20패를 기록했다면, 1973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윌버 우드(24승 20패)와 스탄 반센(18승 21패)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한 팀에서 20패 투수 두 명을 배출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뻔했다. 그러나 본더맨은 좌절하지 않았다.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앞세워 디트로이트 중심 투수로 성장해갔다. 이듬해인 2004년부터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따냈다. 2005년에는 개막전 선발 투수 자격을 얻었고, 2006년엔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2003년에 19번 패전 투수가 되면서 쌓아 올린 경험이 본더맨을 더 강하게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