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9일 ‘법무·검찰개혁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박 장관은 발족식에서 “국민 80% 이상이 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신설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에서 보듯 국민 대다수는 신속하고 강력한 검찰 개혁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법무부의 탈검찰화, 공수처 설치, 전관예우 근절, 검찰 인사제도 공정성 확보 방안 등이 논의됐다. 11월까지 검찰 개혁 권고안이 발표될 예정이다.
법무·검찰개혁위는 참여정부가 다진 초석을 이어 받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검찰의 ‘인사 적체 배출구’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법무부를 검찰과 분리하는 작업에 속도를 낼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법 개정 없이 대통령의 권한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민정수석과 장관 자리부터 비검찰 출신이 꿰찼다. 다음 단계는 법 개정으로 법무부와 검찰의 이음새를 도마에 올리는 일이다.
문제는 법무부의 이런 개혁 방침 발표 하루 앞서 검찰이 이미 ‘셀프 개혁안’을 내놨다는 점이다. 8일 문무일 신임 검찰총장은 기자 간담회에서 “사회 각계의 덕망 있는 분들을 모셔 ‘검찰개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이를 지원할 ‘검찰개혁추진단’을 대검찰청에 설치하겠다”고 밝힌 바 있었다. 스스로 개혁하겠다고 나선 검찰의 발표 직후 법무부가 검찰을 손보겠다고 나선 꼴이다. 검찰 관계자는 “거의 저격 수준이다. 대놓고 검찰보고 개혁 칼날 내놓으라는 말과 같다”고 반응했다.
경찰개혁위는 오는 10월 21일 경찰의 날에 ‘경찰개혁권고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경찰은 정기·수시회의에서 도출된 협의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고 심의·의결한 안건은 바로 시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구속력은 없지만 경찰은 최종 권고는 대부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경찰의 이런 검경 수사권 조정 ‘볕 자리 선점’은 현재 포화 속으로 빠져 들었다. 최근 이철성 경찰청장과 강인철 중앙경찰학교장이 암투를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청장은 지난해 광주지방경찰청장이던 강 교장에게 ‘민주화의 성지’ 문구가 담긴 광주청 페이스북 게시물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상태다.
최근 이철성 청장을 향해 촉발된 광주민주화운동 비아냥 의혹은 현 정권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안 그래도 임기 내내 친박 비호세력으로 분류되며 비난의 화살을 한 몸에 받아 온 이 청장이었다. 박근혜 옛 대통령의 마지막 인사로 알려진 이 청장은 촛불집회 때 법원의 행진 허용 판결을 무시하거나 박근혜 5촌 살인사건 재수사를 거부하기도 했다.
의혹이 터지자마자 경찰 안에서는 이철성 청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공무원 특유의 ‘쉬쉬하기’ 정서가 고개를 들며 “그래도 그렇지 안에서 벌어진 일을 그렇게 폭로할 수 있냐”는 여론이 조성됐다. 익명을 원한 한 경찰청 관계자는 “처음에는 이 청장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게 좀 지나니까 왜 굳이 안의 일을 밖으로 폭로해 경찰 전체가 싸잡아 비난당하는 상황을 만들었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진흙탕 싸움이 그칠 줄 모르고 강인철 교장에 대한 비위 의혹 수사까지 시작되자 경찰 내부에서는 수사권 조정은 물 건너 갔다는 푸념까지 나온다. 강 교장은 직권남용과 뇌물수수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자포자기의 목소리가 들린다. 또 다른 한 경찰청 관계자는 “지금 똘똘 뭉쳐 검찰 개혁에 대비하는 것도 모자란 데 내부에서 이렇게 싸워 버리면 누가 수사권을 경찰에게 주자고 나서겠는가. 수사권 가져오는 건 힘든 일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법무부와 검찰, 경찰 등 행정부 산하 조직이 개혁위원회를 가지고 셀프 개혁을 외치는 이 상황을 사법부는 오히려 반기는 눈치다. 여론의 관심이 ‘판사 블랙리스트’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사법부 행정을 맡은 법원행정처는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파악한 판사 블랙리스트를 작성·관리해 왔다는 의혹에 빠진 바 있었다.
판사들이 들고 일어섰다. 진상조사위원회가 조직됐고 판사회의가 개최됐다. 하지만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추정되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는 열리지 않았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최종적으로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판사들은 지난 6월 추가 조사를 청원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를 거부했다.
판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민 10만 명이 지난 7월 말 진상조사를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모든 관심은 행정부의 진흙탕 싸움으로 돌아가 버렸다. 익명을 원한 한 판사는 “대법원장 교체에 대한 기대감이 있긴 하다”면서도 “하지만 대법원장 교체와 진상 규명은 다른 일이다. 지금 진상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 정국은 받아들이기 정말 힘들고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